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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갈등’ 근원…‘한일병합조약 불법성’ 문제해결 시급

‘위안부 갈등’ 근원…‘한일병합조약 불법성’ 문제해결 시급

윤성원 기자 | 기사승인 2011. 12. 2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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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
[아시아투데이=윤성원 기자] “한국의 어머니는 흑인 노예 모양 일을 하고/ 아무 찬양도 즐거움도 받은 적이 없어라/ 이 땅의 어머니는 불쌍한 어머니…// 5월의 비췻빛 하늘 아래/ 오늘 우리들의 꽃다발을 받으시라/ 대지와 함께 오래 사시어/ 이 강산에 우리가 피우는 꽃을 보시라.”

노천명 시인의 ‘어머니의 날’이라는 시의 일부다. 시인이 의미한 객체는 ‘어머니’였지만 오늘날 이 시를 통해 한국의 위안부 생존 할머니들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위안부 할머니의 생존자 숫자는 이제 6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은 살아 있는 동안 ‘대지에 피는 꽃’을 볼 수 있을까.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가 짓밟히지 않는 새로운 생명으로 환생하는 것은 모든 위안부 출신 여성들의 한(恨)맺힌 소망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들의 한은 곧 우리의 한이 될지도 모른다.

최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우리 정부의 요청에 답하는 대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에 세운 평화비 철거를 요구했다.

1965년 한일 기본협정으로 모든 청구권 문제가 최종 해결됐다는 그들의 기존 입장을 바꿀 가능성 또한 크지 않아 보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이장희(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최근 한일 양국의 국제법, 역사학자들과 함께 펴낸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은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의 근본 원인이 1910년에 맺어진 병합조약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나아가 병합조약의 무효성·불법성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3차 한일협약 등이 맺어진 과정에서 자행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지적한다.

책은 한일 두 나라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했다. 국제법학자와 역사학자들 간 공동연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통섭(通涉·Consilience)의 시대조류에도 부합한다. 무엇보다 국제법상 국가책임을 규정했다는 점에서 소장할 가치를 지닌다.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 병합조약에 대해 ‘정당하지는 않지만 형식적 적법성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공동저자로 참여한 이토 나리히코(伊藤成彦) 일본 중앙대 명예교수는 강자들의 ‘합의의 표현’인 국제법·국제관습이 19세기말~20세기초 국제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토 교수는 “그러나 당시 ‘늑대들의 국제법’에 대해 ‘양들의 국제법’이라고 부르는 약자의 법 또한 존재했다”며 “1889년 제1회 미국의회라는 공개적 장소에서 ‘전쟁의 위협 또는 병력의 현재에 의해 생긴 결과는 그것을 무효로 하는 취지의 권고’가 행해졌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국가 간 모든 조약의 유효성 판단 기준을 정하고 있는 ‘조약에 관한 비엔나협약’ 또한 이러한 ‘양들의 국제법’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성문법이다.

이토 교수는 이 같은 관점에서 “비엔나협약은 일본 정부가 ‘시제법’ 이론에 의해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늑대들의 국제법’에 근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그것을 비판·부정한 ‘양들의 국제법’이 보편화된 것”이라며 “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이 도덕적·법적·정치적으로 잘못된 행위했다는 것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우선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마모토 코슈(山本興正) 일본 도쿄대 교수는 한일합방의 의미를 역사적인 시각에서 제공한다. “한일합방이란 말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단어가 아니라 메이지(明治) 시대를 거쳐 줄곧 이어져 내려오면서 커진 일본의 조선 멸시정책의 종착지”였다는 것이다.

그는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식민지 지배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키지만 모든 사건들에는 폭력·전쟁이 불가피하게 따라다녔다”며 “이 점이 중요한 포인트”라고 지적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18일 교토 영빈관 스이메이노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일본의 '대국적' 결단은 가능할까?

흥미로운 것은 야마모토 교수가 밝힌 당시 일본 정부와 민권론자들의 관계다. “정부에 비판적이라 여겨졌던 민권론자들이 오히려 ‘조선 정벌’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국권수호론에 흡수돼 갔다”며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일본 내 좌파와 우파를 규합시키는 존재였다”고 분석한다.

이상찬 서울대 교수는 △일본 측이 일방적으로 병합조약을 추진했다는 점 △대한제국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 제약이 많았다는 점 △조약 체결에서 순종의 황제권 행사에 문제가 많았다는 점 등을 들어 병합조약안에 대한 한국황제의 재가 여부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조약을 무효로 하는 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성립 절차를 대체로 거쳤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연구자들은 병합조약에 대한 한국 황제의 재가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대한제국이 국내법에 (조약)처리절차를 규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전회의에서 ‘구두’로만 처리했다”며 “한국황제가 병합조약안을 재가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다.

책은 서두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한일병합조약이 무효라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한반도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결론은 명확하다.

“35년 간 한국은 일본의 강압적 점령상태 하에 있었으며 국제법상 행위능력은 제한돼 있었으나 국가의 동일성과 계속성(권리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강박으로 우리의 경찰권을 박탈했지만 우리의 주권은 법적으로 박탈하지 못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서 구조약(舊條約)의 무효확인조약은 결국 당초부터 무효라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은 더 이상 시대의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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