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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16년 광화문 광장의 군중심리

[칼럼] 2016년 광화문 광장의 군중심리

기사승인 2016. 12. 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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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군중 신화화, 언론 정치와 결탁 죄 단죄 '비정상'...법의 정신으로 민주주의 꽃 피워야
오창우
오창우 계명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도처에 적대감이 표출되고 있다. 합리적 의심의 수준을 넘어서서 “그냥 싫다”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인정 내지는 존중의 미덕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하다. 집단지성이나 사회적 도덕성은 다른 나라 얘기다. 적대적 투쟁 내지는 우월성 투쟁만이 살아 숨 쉰다.

한국 사회에 근대화 과정이 있었던가.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다’느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니 하는 것 자체가 착시였다. 한류·정보기술(IT) 강국이라며 전 세계 문화와 기술을 견인하는 것처럼 자신한 것도 착각이었다. 전쟁의 기운을 억누르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보니 타인과의 조화로운 관계, 공동체의 선, 합리적 소통을 위한 터전을 만들지 못했고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국가의 진면목도 갖추지 못했다.

2016년 말미, 광화문 광장에 단두대가 설치되고, 포승줄에 묶인 대통령 사진이 등장하고, 포효하는 듯 성난 군중들의 모습에서 적의와 분노의 표적이 된 프랑스 혁명 시대 마리 앙투아네트 모습이 오버랩된다. 프랑스 혁명은 낡고 부패한 왕정의 시대를 끝내고 인간의 의식에 빛을 밝히는 계몽(enlightenment)을 낳았지만 광화문 군중들은 도대체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이 한 세기도 전인 1895년에 발표한 저서 ‘군중심리(차예진 역)’는 군중이란 어떤 특정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집합체이며, ‘구성하는 개개인의 성격과는 다른 새롭고 강한 특징을 갖게 된다. 의식을 지닌 인격체는 사라지고 개인들의 감정과 생각은 전부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일시적이긴 하지만 매우 명확한 특성을 드러내는 집합적 영혼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조직된 군중’이라 불렀고 ‘혼자서는 교양 있는 인간이었을 한 개인이 군중 속에서는 야만적이며, 본능적으로 변한다. 그는 원시적 인간의 자발성·폭력성·사나움뿐 아니라 열의와 영웅심까지 지니고 있다’고 간파하였다.

광화문에 모인 군중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처한 개인들의 집합일까? 그들의 분노와 적의는 도대체 누구를 향한 것일까? 또 군중이 된 각 개인은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간다 할지라도 군중이라는 익명성 뒤에 숨은 각 개인의 감정과 생각은 얼마나 동질적일까? 군중의 적대적 투쟁에서 피아(彼我) 구분은 분명한 것인가?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일까? ‘이게 나라인가’하는 그들의 질문 속에 귀책사유로서 자신을 완전히 제외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핵심 문제는 ‘누가 이 군중의 감정과 행동 방향성을 결정하는가’다. 인터뷰를 들으면 군중 속 개인이나 정치가들은 언론매체가 사용하는 어휘나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얼마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한 언론이 보도하면 다른 언론이 사실 확인도 없이 그대로 따라 보도하고, 독자(시청자)는 그 보도를 아무런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인다.

특히 종합편성채널들은 정치평론가·변호사·국회의원 낙선자·전직 언론인·전직 형사·심리학자라는 몇 몇 인사들을 돌려막기 출연시키면서 끊임없이 의혹을 부풀린다. 그들은 각자의 정치적 목적을 드러내면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특정인을 단죄하고 판결하며, 심지어 관상과 묘자리까지 입을 댄다.

어떤 주장이나 의견은 최소한 인과관계(因果關係)나 상관관계(相關關係)의 논리성을 갖추어야 설득력을 얻는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대상을 믿고 싶은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또 아는 만큼만 볼 수밖에 없다. 언론사들도 지금의 사태를 원하는 대로 보고, 쓰고, 전달한다. 대체적으로 한 방향으로 쏠리고 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보고 싶지 않아도 보여줘야만 하는 진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드물다. 언론이 정치와 결탁, 사법부가 돼 죄를 단죄하는 지금의 형국은 ‘비정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안은 사안대로 봐야 한다. 대통령의 무능력과 부도덕성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과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별개다. 법률적 시비도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탄핵을 요구하고, 헌법재판소의 조속한 심판을 압박하고, 그것도 모자라 즉각적인 하야를 요구하는 광장의 군중을 신화화하는 분위기, 또 그러한 분위기를 어느 한 쪽의 관점에서 확대재생산하는 한국 언론의 작동방식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우리 사회의 평균적 도덕성은 추상명사인 국가나 나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통명사인 한국 국민이나 시민의 도덕성에 의해 형성된다. 국가 최고 책임자의 무능력과 부도덕성을 극단적으로 들춰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의 정신에 의존해야 한다. 군중들이 그토록 원하는 민주주의가 이 땅에도 꽃피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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