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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향노루 지나간 봄 산 풀끝마다 향기가 스며있다

[칼럼] 사향노루 지나간 봄 산 풀끝마다 향기가 스며있다

기사승인 2017. 02. 2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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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영 수필가, '편지가 꽃보다 아름답다' 저자, 인사동 '희여골' 대표

중국 항저우 어잠현에서 수행하던 승려가 자신의 거처를 녹균헌, 푸른 대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했다. 소동파는 그 선실을 두고 어잠승녹균헌(於潛僧綠筠軒)이란 시를 지었다. <밥 먹을 때 고기는 없어도 되지만 / 사는 집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아니 되지 / 고기가 없으면 사람이 야윌 뿐이지만 /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속물로 된다네 / 사람은 야위더라도 다시 살찌울 수 있지만 / 선비는 한번 속물이 되면 다시 고칠 길이 없다네(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


예전의 선비는 마땅히 물욕을 경계하고 지조와 절개를 지키려고 마음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오히려 거꾸로 되었다. 고기를 탐하지 대나무를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호스트바라는 기괴한 직업이 생길 정도로 물욕과 쾌락을 탐닉한다. 사랑의 크기도 돈으로 재단되고 만남과 헤어짐도 별다른 설렘과 눈물이 없다. 그러나 살아서 꼭 한번만이라도 해보고 싶은 사랑, 평생 그리움을 남기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케네디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은 케네디 사후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23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재혼했다. 세계에서 최고로 주목받은 결혼이었고 그녀의 사치와 낭비는 넘칠 만큼 충족되었지만 조그만 해안도시 통영에서의 사랑만큼이나 부럽거나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청마 유치환은 통영여중 국어교사로 부임하며 가사교사였던 정운 이영도를 만났다. 당시 유치환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몸이었고 이영도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외동딸을 키우고 있는 미망인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청마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마음을 열지 않는 정운... 가까이 할 수 없는 청마의 저미는 아픔은 시가 되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파도-유치환)> 청마는 정운을 만난 후 20년 동안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6 ·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탔음에도 불구하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나 되었다. 봄볕이 얼음을 녹이듯 청마의 끈질긴 열정은 마침내 정운의 바위처럼 찬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오면 민망하고 / 아니 오면 서글프고 /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 정작 마주 앉으면 / 말은 도로 없어지고 /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 그대로 일어서 가면 / 하염없이 보내니라(무제-이영도)> 둘은 물욕도 육체적 탐닉도 없이 죽풍(竹風)처럼 맑은 사랑을 이어갔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였다. <........... /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행복-유치환)> 부산여상 교장으로 재직하던 청마는 1967년 2월 13일 저녁 예총 일로 문인들과 모임을 끝내고 술에 취해 정운의 집 애일당(愛日堂)에 들르겠다고 했으나 정운이 말렸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청마는 시내버스에 치여 운명을 달리했다. 20년간의 편지가 갑자기 뚝 끊겼다. 매일매일 우체부를 기다리던 그 설레임,,, 홀로된 적막감,,, 다시 볼 수 없는 애달픔,,, 차라리 잠깐이라도 오라고 했었더라면,,, 정운은 아프고 절절한 마음을 시조 '탑'에 담았다. <너는 저만치 가고 / 나는 여기 섰는데 /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 돌아선 하늘과 땅/ ...... (탑-이영도)> 5~6시간 버스를 타고 와서 단지 수 십분만 얼굴을 보고 돌아가던 그런 애틋함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많고 가장 값지고 가장 오래 기억될 편지가 있었다. 청마가 간들 정운이 어찌 청마를 보낼 수 있었겠는가! 청만들 어찌 정운을 두고 차마 걸음이 떨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제는 사랑도 조건이 앞서고 쉬 잊는다. 빠르고 즉흥적이다. 수줍음도 기다림도 고루할 뿐이다. 그러나 비록 모자라 보일지라도 나는 나만이 간직하고픈 하나의 별이 그립다. 청마와 정운은 갔지만 나는 봄꽃 속에서 그 둘을 본다. 꽃은 제자리에 있지만 그 향기는 세상을 적신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봄 산에는 발자국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스며든다(麝過春山草自香). 청마와 정운, 그 지순했던 사랑은 재클린의 사랑보다 더 모두의 가슴을 적시고 설레는 여운으로 남는다. 죽향(竹香)같은 사랑, 그 애절한 그리움에 설도와 황진이의 시를 합성, 개작한 졸시(拙詩)를 바쳐본다. <꽃이 펴도 즐길 이 없고 / 꽃이 져도 슬퍼할 이 없네 / 그리운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 꽃은 피고또 지고 있건만 //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 해맑은 기약은 아득만 한데 / 차마 한마음 맺지 못했네 / 어쩔거나 가지 가득 저 꽃들을 / 날리면 모두 다 그리움인데 // 웃던 모습 손 내밀면 잡힐 듯한데 / 애달퍼라 만날 길은 꿈길뿐이네 /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 그님도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 매양 어긋나는 꿈이지만은 / 그래도 잊을 수 없어 밤마다 꿈길여네 // 바라거니 언제일까 / 반가이 한번 만나는 날은 / 오늘밤 꿈에서도 설레며 길 나섬을 / 그리운 그님은 알고나 계실까(꿈길-황태영 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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