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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낯선 아리랑

[칼럼] 낯선 아리랑

기사승인 2018. 09. 2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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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남도의 아리랑이 ‘문경세재는 웬 고개냐’는 가사가 무색하게 한반도의 꼭대기에 올라 그 특유의 흥과 한을 담아 울려 퍼졌다. 숨 가쁘게 백두산 정상에 선 두 정상 앞에 서서 아리랑은 그들을 압도한 듯하다. 뉴스에 올라온 짧은 영상을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났다. 필자 주변의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듯싶은데 많은 이가 눈물을 흘린 듯하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공이 의외였다. 연변의 진달래 향을 품은 꽃분홍색 한복을 입은 북녘의 예인도 아니고 단아한 듯 처연한 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남도의 명창도 아니었다. 흥미롭게도 아리랑이 선택한 목소리는 대중가수의 알리였다. 어딘지 낯설었다.

알리가 국악 전공자였던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그녀가 백두산 천지에 올라 진도아리랑을 부를 줄 몰랐다. 가수 지코와 에일리 그리고 마술사 최현우의 캐스팅과 공연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면 알리와 진도 아리랑은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한 조합이었다. 알리를 포함한 세 명의 가수들은 멋진 가창력으로 한반도기와 어울릴만한 노래로 만찬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쯤 수행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알리는 전혀 다른 퍼포먼스 무대에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연출은 지난 4월 27일 판문점 정상회담에서도 보였는데, 당시 필자가 주목한 건 제주소년 오연준 군이 등장한 만찬회장의 무대였다. 한반도의 남녘 끝에서 판문점까지 올라온 소년이 고운 목소리로 부른 노래는 ‘고향의 봄’이었다. 북쪽 지도자의 모친 고향이 제주도임을 감안할 때 매우 치밀한 연출이 아닐 수 없다. 그 공연은 어머니의 고향을 방문한 북한의 젊은 지도자에게 사모곡을 들려주는 무대였으며 또한 그에게 남북이 한 형제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잘 기획된 퍼포먼스였다. 그런데 이번 알리의 천지공연은 여행 중에 일행의 누군가 소리꾼이 있어 즉흥연주를 한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 사실이 낯설었다.

유난히 필자의 눈엔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복장이 눈에 띄었다. 천지 주변의 낮은 기온 때문에 챙겨 입은 것 같은 검은색 패딩에 긴 노랑머리를 한 한반도 남쪽의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건강해 보이는 평범한 아가씨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화려함도 배제한 채 아무런 무대도 없이 남과 북의 지도자와 영부인들, 그리고 양국의 수행원들 속에 묻힌 채 아리랑은 알리의 목소리를 통해 천지를 가득 채웠다. 일행 중 어떤 이는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일부는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즐겼다. 그 모습이 참으로 평범한 일상처럼 보였다. 그래서 낯설었던 것 같다.

필자가 유럽에 머물렀을 때 우연히 아리랑 플래시 몹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관악기의 선율에 오히려 그 낯익음이 낯설게 느껴 발걸음을 멈추었던 적이 있다. 그 낯익은 낯선 선율을 타고 하나둘씩 늘어나는 악사와 악기들로 거리의 광장은 풍성한 한 마당이 됐다. 현지인들이 호기심에 사진을 찍고 음악을 감상하는 모습은 즐거워 보였다. 낯선 음악을 대하는 그들의 반응은 자연스러웠다. 정작 필자는 그 낯익은 선율이 낯설어 전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고, 어떤 감흥에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마저 들었던 기억이 있다.

말하자면 낯이 익어서 낯설었다. 낯익은 것이 낯설게 다가올 땐 눈물이 난다. 일상의 자연스러움이 어떤 공간과 시간에서는 특별한 무엇이 되기도 한다. 전투를 멈추고 서서 어린아이의 청아한 목소리로 듣는 동요 ‘고향의 봄’은 우리를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하다. 생각해 보면 지난 4월의 남북정상이 만나기 전만 해도 우리 민족은 말로써 서로에게 핵과 장사정포로 불바다 운운하며 위협하고 정밀 타격시스템을 활용해 참살부대를 보내느니 마느니 하는 선동의 시간을 통과했다. 우리는 잠시 정전일 뿐 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투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에 올라탄 구성진 아리랑이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온 이유다.

왜 그리도 알리의 공연이 낯설어 보이고 눈물이 났을까? 감동도 감동이겠지만 아직 우리가 정전 중이며 종전을 선언하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싶다. 자의 든 타의 든 디아스포라(이산) 중에 만난 아리랑은 우리의 DNA 어딘가 꼭꼭 숨어 맥락을 달리하고, 그 선율에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도 눈물짓게도 만드는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한복을 입고 무대에서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보는 아리랑이 아니라 남과 북의 거리 곳곳에서 함께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의 음악이 되기를 바란다. 아리랑은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는 새로운 역사의 시공간으로 우리를 호명하고 있다. 이런 호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천지의 공연을 더 이상 낯설게만 바라보지 않고, 지인들과 어울려 간 여행에 운 좋게도 소리 좀 하는 이가 있어 아리랑이 그의 목소리를 빌려 나오기라도 하면 흔쾌히 어깨춤을 추고 싶다. 다 함께 그 평화의 전율을 흥으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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