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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화가 아닌 전쟁에 대한 이야기

[칼럼] 우화가 아닌 전쟁에 대한 이야기

기사승인 2018. 12. 2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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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대개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춘 영화들은 화해를 시도한다. 크리스마스는 절기로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데, 12월 25일은 달의 주기를 따르는 동양의 절기상 동지와도 거의 일치한다. 이는 태양신 숭배 사상과 뿌리가 같다. 태양의 빛이 가장 적게 비추는 날, 다시 말해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어두운 하루, 봄은 요원해 보이지만 반드시 온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날이 아이러니하게도 동지이다. 그 어둠 속에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동지 이후 낮이 길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태양신을 맞이하는 날,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유도 그가 가장 낮은 곳에 임하다 스스로를 불태운 데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한줄기 불빛은 점차 어둠을 소멸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되는 많은 영화들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관객은 그것을 은근하게 기대한다.

크리스마스시즌에 맞춰 개봉한 영화 ‘스윙 키즈’는 기대와는 달랐다. 아픔을 희망으로 노래하지 않았고, 어설픈 휴머니티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 하지도 않았다. 먹먹했다. 우화의 형식을 취한 스윙 키즈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전쟁은 한편의 우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화로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관객의 기대심리를 충족시킨다. 언젠가는 전쟁이 끝나리라는 희망은 삶을 내려놓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살며 사랑하며 아이들을 낳고 기른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대하드라마에 사랑이 빠질 수 없는 이유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반어적 표현도 궁극적으론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같은 맥락에서 전쟁을 우화로 그린 영화들은 대개 흥행에 성공한다.

그러나 영화 ‘스윙 키즈’를 연출한 강형철 감독은 용감하게(?)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비극적인 한국전쟁에 대한 두 편의 우화를 비틀어 놓았다. 한편은 ‘태극기 휘날리며’이고, 다른 한 편은 ‘웰컴 투 동막골’이다. 흥행에 성공한 두 작품의 공통점 역시 전쟁을 우화로 그려내고 있다. 전작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형제애란 휴머니즘을 통해 우화적으로 표현했다면, 후작은 인류애란 보편적 정서로 전쟁의 상흔을 동화적인 방식을 빌려 극복하려 했다. 비극적인 결말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로 끝을 맺는 것은 관객이 어떤 결말을 기대하는지 정확하게 계산된 엔딩 전략이다. 저주가 아닌 용서의 외마디와 손짓, 그리고 마을 공동체를 넘어 동포와 인류로 확장되는 화해의 정서는 사람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스윙 키즈’도 얼마든지 그와 같은 방식의 결말로 끝을 맺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감독은 우화를 비트는 형식의 우화를 만들어냈다. 그의 우화에는 리얼리티가 있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우리 민족에게 형제애와 인류애에 대해 전혀 눈뜨게 하지 못했다. 그 어떤 성찰과 교훈도 남기지 않았다. 1950년은 이념으로 부모와 자식이 그리고 형제와 친지가 갈라지는 일이 일상이 되는 원년이었다. 그리고 그 긴 장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인위적인 가로막으로 이들을 갈라놓은 세월이 70년, 가끔 생색이라도 내듯이 그 긴 세월을 보상한답시고 그저 며칠 만남을 주선하고 다시 생이별을 고하게 만드는 잔혹함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게 현실임에도 우리는 전쟁영화를 통해 형제애를 느끼고 인류애를 말한다. 얼토당토않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두 명의 배우를 투톱으로 서로 사랑하다, 싸우다, 다시 사랑하게 만듦으로써 수월하게 우리가 현재에도 전쟁 중임을 잊게 하고 봉합시킨다. ‘웰컴 투 동막골’의 국방군과 인민군과 미군이 연합해 민간인 마을을 구한다는 설정은 판타지다. 뻔히 판타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판타지를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 중에 거리에 널려있는 시신들 앞에서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아이들의 눈망울에 비친 그 일상은 판타지가 아니고서는 맨 정신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것을 날것 그대로 직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형벌이다.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 중 어떤 특정 인물의 죽음은 살아남은 이야기 속 인물들에겐 고통이지만, 관객에게는 일종의 희생제의다. 그 희생제의를 통해 정화의 정서로 모든 것이 수렴되고 발산된다. 그와 같은 방식을 통해 전쟁영화는 우화가 돼 간다. 우화는 사람살이에 대한 성찰과 교훈을 남기지만 피가 철철 넘치는 살풍경을 그대로 담아내진 않는다. 우화로서 전쟁은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스윙 키즈’는 우화로써 ‘우화가 아닌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기존의 우화가 실패한 지점에서 ‘스윙 키즈’는 출발하고 있다.

2018년 세밑, 2019년 어느 날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소식을 기다려본다. 그때 ‘스윙 키즈’를 다시 보고 싶다. 그들의 탭댄스에 몸과 마음을 맡겨보고 싶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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