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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판 좀비물, 배제와 포획의 정치학

[칼럼] 한국판 좀비물, 배제와 포획의 정치학

기사승인 2019. 02. 2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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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 좀비물이 여럿 변이된 형태로 출몰(?)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서울역’, 영화 ‘부산행’ 이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 ‘창궐’과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시대극 드라마 ‘킹덤’, 그리고 최근 개봉한 좀비 블랙코미디 영화 ‘기묘한 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와 내러티브를 선보이고 있다. 사실 좀비영화는 이솝우화와 닮아 있다. 이솝우화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에 대한 풍자로서 알레고리는 좀비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좀비물이 흉측한 시체들과 피로 범벅이 된 고어물임에도 블랙코미디와 잘 어울리는 것은 우화적이기 때문이다.

부두교 의례에서 유래된 좀비는 수많은 변형의 시도 끝에 다양한 코드로 변종됐다. 그럼에도 ‘좀비는 살아있는 시체’라는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지만 영혼이 없다. 사람들을 마구 공격해 좀비 바이러스를 퍼트린다. 따라서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이웃과 친구, 부모·형제도 가릴 것 없이 좀비가 된 자는 처단한다. 인간과 좀비의 대립 구도에서 ‘공공선이라는 대의’는 분명해 보인다. 영혼이 없는 존재이기에 그들을 처단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양심과 도덕 같은 윤리의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좀비를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논리의 근거엔 ‘결핍’이 자리 잡고 있다. ‘영혼의 부재’라는 결핍은 배제를 넘어서 박멸의 대상이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시사용어로 원용된 좀비(zombie)라는 개념어는 ‘대기업과 같은 큰 조직에 속해 일하는 사람들 중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일하는 영혼 없는 직장인들’을 말한다. 남들이 들어가기 힘든 대기업에 운 좋게 들어가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그 대가보다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는 자들에 대해 가질법한 미움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에 있다. 대기업과 같이 취업이 어려운 조직에 들어간 이들은 반드시 그에 맞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러한 논리엔 배제가 뒤따른다. 일의 성과에 대한 지표가 낮게 나오면 언제든지 아웃될 수 있다는 경고다. 자본주의에서 능력은 영혼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능력이 없으면 영혼이 없는 존재다. 영혼이 없는 존재에게 가해지는 칼날엔 정당성이 부여된다.

한편 좀비는 시체이기 때문에 몸의 부패가 진행 중이다. 각막과 같이 취약한 부분이 먼저 세균의 공격을 받는다. 좀비의 눈이 허옇게 된 이유다. 그들의 시각은 퇴화됐다. 따라서 시각보다는 후각과 청각에 의존해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나면 동료이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는 인간이다. 좀비의 시각이 퇴화됐다는 설정은 ‘시선의 권력’에서 배제된 대상 세계를 의미한다. 영화 ‘기묘한 가족’에 등장하는 ‘좀비 완벽가이드’ 매뉴얼에 의하면 좀비는 ‘빛과 소음’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좀비가 빛과 소음에 지향성을 갖는 대상 세계라는 설정이 제시하는 바는 매우 흥미롭다.

영화에서 좀비들은 폭죽과 네온사인의 화려한 불빛, 스피커를 통해 증폭된 사운드에 기민하게 움직인다. 좀비들을 퇴치하기 위한 폭죽의 화력은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어차피 죽은 이들이기에 불에 데어도 통점은 없다. 오히려 불이 옮겨붙어 터진 폭죽 드럼의 폭발에 그들은 넋을 잃고 불꽃을 바라본다. 그들의 넋 잃은 표정은 영혼이 있었던 존재였음에 대한 역설이다. 혹은 좀비가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반증이다. 좀비는 영혼이 없다는 설정은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만든 서구의 허구이다.

중세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빛과 어둠의 관계로 증명하고자 했다. 빛이 없는 곳이 어둠이므로 선이 없는 곳은 악이다. 중세유럽의 선은 크리스트교적 정의가 구현된 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크리스트를 모르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은 악의 소굴이다. 정복돼야 할 대상이다. 개종하지 않으면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다. 변방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낮은 곳에 임하였던 그리스도 예수가 바란 세상은 아닌 듯싶다. ‘변방에서 중심으로’가 아니라 ‘변방의 변방다움을 허하라’는 외침이 예수의 가르침이지 않을까 싶다.

종교와 민족이라는 배경이 아니라 인류애라는 기본 소양에 충실한 인간으로서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방인들은 포획되거나 배제돼야 할 존재들이다. 좀비는 형언 모순과 같은 모순의 중간 어딘가에 실재하는 모순과 모순 사이의 존재다.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좀비’라는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엔 살아있다는 중간지점이 존재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본능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비가 먹잇감에 집착하고 바이러스를 유포시켜 자기복제를 시도한다는 것은 생존코드로서 본능에 대한 은유이다. 본능만을 충실히 따르는 괴물 같은 좀비들은 희생양으로 선택하기 최적화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생존투쟁과 같은 본능적인 폭력보다 무서운 것은 초자아와 같은 현실원칙을 추동하는 체계로서의 폭력이다. 인간계라는 상징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배제의 논리로 무장함으로써 진짜 폭력적인 존재가 된다. 시스템에 활용가치가 있으면 무엇이든지 이용하고 소진되면 가차 없이 버린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속성으로서 성과주위라는 배제의 논리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인간은 배척할 대단위의 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적은 좀비처럼 영혼이 없는 집단이어야 한다. 결핍을 전제로 그들은 학살된다. 좀비는 포획되지 않으면 배제돼야 할 대상 세계를 의미한다.

전통적인 좀비영화에 숨겨진 코드가 ‘배제의 정치학’이라면 한국판 좀비물에는 대상 세계에 대한 ‘포획의 코드’가 추가됐다. 우리 사회가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사회라는 방증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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