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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사바하’, 묵시문학 비틀기

[칼럼] 영화 ‘사바하’, 묵시문학 비틀기

기사승인 2019. 03. 0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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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영화 ‘사바하’에는 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내러티브에 녹아 있다. 대개 지식기반의 아이템과 대중서사가 만났을 때 상징들은 불친절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어떤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갑론을박하는 동안 다양한 해석이 양산되기 마련이다. 모호성에 기초한 이와 같은 전략은 일종의 ‘대화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불특정 관객과 텍스트가 만나 서로 호흡을 섞으며 대화를 나눔으로써 해석이라는 개별개별의 메타 텍스트가 생산된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의 독자로서 관객들은 저마다 텍스트와 다양한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필자의 글 역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애써 밝혀두고자 한다.

필자에게 ‘사바하’는 왜곡된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묵시문학에 대한 비틀기로 읽혔다.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은 ‘경전에 숨어있는 신의 뜻을 전하고 종말과 심판 그리고 미래에 도래할 천상의 세상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다. 묵시록과 같은 예언서들이 우리의 마음을 훔치는 것은 죽음 이후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상상의 힘은 위대하지만 동시에 가공할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

상상력은 이상세계를 현실로 끌어와 우리의 삶에 진보적 한 걸음을 내딛게도 하지만, 미지의 영역에 현실 세계를 받침으로써 개인의 일상이 파괴당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묵시문학과 같은 종교와 상상력의 결합은 우리의 전두엽을 고양시키기도 마비시키기도 한다. 이 둘의 결합이 만들어낸 믿음은 지친 우리의 일상을 위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 왜곡된 믿음으로 인한 원한과 증오로 얼룩진다. 끊임없는 폭력과 테러로 연일 뉴스가 도배되는 데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

‘사바하’에서도 왜곡된 믿음으로 인한 숱한 죽음이 등장한다. 예언을 막기 위해 가공된 ‘항마록’의 2차 예언에 따라 어린 소녀들이 소리소문없이 죽어가고, 살인을 수행하는 짐승들(사천지왕)도 죽어간다. 그들은 죽어서 살겠다는 의지로 무장·세뇌된 자들로서 임무 수행 후 머뭇거림 없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자기 이행적 예언의 확증편향으로서 악을 제거한다는 그들의 신념은 어린 소녀들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스스로 멸한다. 영화에서는 피해자도 살인자도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신을 자처한 절대적 존재의 불사를 위해 봉헌된다.

희생제의에 호명된 자들은 자의건 타의건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거나 환생을 기대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절대적 존재는 이승에서 영원히 사는 불사를 꿈꾼다. 이승을 버림으로써 저승을 얻어야 하는데 절대자는 자신을 추종하던 인물들조차 저승으로 보내고 이승을 수호한다. 이로써 저승은 희생된 이들의 것이고, 이승은 신이 되고자 한 자의 영역이 된다. 천상의 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세계가 뒤바뀌게 되는데, 이제 절대자가 존재하는 이승이 신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다. 영원으로 이어질 것만 같은 선형적 띠는 희생제의의 제물들에겐 탈출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다.

묵시문학에 대해 그간 행해진 오독은 종말과 함께 이어지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죄악 속에 살아가는 교리에 갇힌 맹목적인 인간은 심판 앞에 무기력하다. 이는 중세가톨릭에서 면죄부가 성행한 예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심판의 결과는 뻔한 것이다. 의지할 것이 교회의 권위밖에 없다면 기꺼이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거나 면죄부를 얻기 위해 십자군에 나서게 된다. ‘사바하’의 짐승들(여아 살인자들)처럼 전사를 자처하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기 구제는 반드시 원한을 수반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 이정재의 대사처럼 오늘날 테러를 일삼는 소수 극단주의를 표방한 종교의 분노엔 ‘신의 뜻’이라는 명분이 뒤따르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분노와 원한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리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묵시록을 비롯한 묵시문학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to mori)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모든 계시는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말하기에 각종 묵시록에 등장하는 예언은 들어맞을 수밖에 없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언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심판이 아니라 모두가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가의 사상처럼 부질없고 덧없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나 예수, 알라의 실천적 삶의 궤적을 쫓아가기엔 인생은 짧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과 성찰의 영역은 미미하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바하’는 사이비 신흥종교라는 설정을 통해 예언서의 오독에서 기인한 배타성과 폭력성을 비틀고 있다. 욕망의 고리를 끊고 해탈해 성불하는 것이 절대 선인 반면 성불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 될 때 가져올 가공할 폭력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번뜩인다. 또한 서구에서 구원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희생제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사바하’의 플롯은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결말은 극 중 예언의 완성으로 끝을 맺는다. 예언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된 경전에 수록된 예언서는 실현 직전 와해되고 비틀어진다. 그리고 영화에서 티베트 라마교 승려가 말한 최초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들어맞는다. 불사를 꿈꾸던 신에 근접한 절대자는 예언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권위가 무색하게 죽어 그와 매개된 존재로서 천적 또한 부질없이 사그라져갔다. 예언의 무서운 고리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해체된다. 만약 영화에서 절대자는 죽고 그와 대척점에서 선악이 뒤바뀐 존재가 살아났다면 예언서가 낳을 심판의 굴레는 영원의 고리에 갇혀 또다시 수많은 희생자를 배출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해결방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끊어버려야 만이 가능하다. 비로소 예언의 완성을 통해 예언의 고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기실 예언서는 실천적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기에 그 끝은 수없이 가공되어 왔다. 이와 같은 왜곡들 사이에서 사이비 맹목적 믿음이라는 질병에 대한 신의 침묵은 ‘신이 스스로에 가한 유폐’이다. 유폐된 존재를 소환해 봉인하는 것은 무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대로 넌센스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로 인해 유폐된 존재에 대해 봉인하기와 풀기를 반복해왔다. 따라서 ‘문’ 앞에 선 인간이라는 은유는 유폐와 봉인의 열쇠를 쥔 선택이라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나약함과 갈등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봉인된 문안의 존재들 역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 나오더라도 불에 탄 재로 돌아간다. 신의 자발적 유폐로서 침묵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나 부조리한 원한의 고리를 끊으면서도 인간이 침묵하지 않는 한 신도 침묵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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