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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약에 관한 여러 가지 단상

[칼럼] 마약에 관한 여러 가지 단상

기사승인 2019. 04. 1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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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 포 어 드림’은 마약 투여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내러티브를 관통하는 파편화된 이미지와 강렬한 사운드는 마약으로 인해 각성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 짐작케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이미지와 사운드에 취하고 끝내 파국을 경험한다. 그 간접체험을 더욱더 두렵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평범한 모자관계이며 동네친구, 연인들이라는 점이다. 마약의 경험은 가족, 친구, 연인사이를 가리지 않고 전이된다.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공멸하게 하는 마약의 힘은 ‘강렬한 중독성’에 있다.

중독의 경험은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게 한다. 그 이유는 물질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공급된 물질은 신경기관을 통해 정신과 연결된다. 물질과 정신이 하나가 되는 경험은 인간에게 한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게 한다. ‘외부로서’ 물질로 존재하는 ‘타자의 세계’가 내부로 들어왔으니 경계 너머의 세계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물아일체의 경험이다. 그러나 합일의 쾌락은 잠시뿐 더욱 강력한 투약을 갈망하게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물질에게 주체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자아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진정한 초극의 경험이 아니라 주체임을 포기하고 노예로 추락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이 처럼 물성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점에선 마약과 자본의 작동원리가 유사한 지점을 보이기도 한다.

전투현장에서 사용되는 모르핀의 경우 강력한 진통효과로 사지가 떨어져나간 병사들의 고통을 잊게 하는 데 이용된다. 의학자들은 모르핀이 뇌 속의 오피에이트(아편제) 수용체와 너무도 정확하게 고리가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마치 자물쇠에 맞는 제 열쇠를 꽂아 신경전달물질을 차단하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해 외부물질인 모르핀과 정확하게 맞는 수용체가 있다면 그에 맞는 내부에서 생성되는 물질이 있지 않을까 연구하게 된다. 그렇게 발견된 물질이 ‘엔도르핀’이다. 뇌하수체에 존재하는 물질로 일종의 호르몬역할을 수행하는 엔도르핀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수많은 통증을 완화시킨다고 알려졌다.

마라톤이나 철인삼종경기와 같은 인간의 극한에 도전하는 많은 이들은 어떤 지점에 이르면 쾌락의 정점을 경험하게 된다고 증언한다. 성적인 쾌락과는 비교되지도 않은 절정의 쾌락을 맞보게 되는데 이를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부른다. 이는 공간과 시간을 극복하는 체험이라고도 요약할 수 있다. 이때도 엔도르핀이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경우에도 중독성이 작동한다. 이 같은 중독성은 엔도르핀의 과다분비로 인해 몸이 망가지는 것도 잊게 하기도 한다. 최근엔 동양의 침술이 통점을 자극, 엔도르핀 수치를 높이고 그로부터 진통의 효과를 본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요약하자면, 고통을 느낄 정도의 적당한 운동과 같은 외부의 자극은 우리 인체 내부의 면역체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게 하지만, 과하면 건강을 해친다.

누군가는 불행한 이에게 마약 대신 운동이나 침술로 다스리라는 뻔한 소리를 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마약에 중독되는 루트는 제각각 다른 사연과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안나 카레리나 법칙’으로 널리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문장을 원용하면 행복한 이는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불행한 이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레퀴엠 포 어 드림’에서처럼 마약을 접하게 되는 경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연과 우연을 가장해 악연을 맺게 되기도 한다.

19세에 쓴 자전적 소설 ‘슬픔이여 안녕’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프랑수아즈 사강’은 두 번의 마약 투약 혐의로 50대의 나이에 법정에 서서 “나를 파멸할 권리가 있다”고 진술했다. 영민한 그녀는 물론 “타인에게 피해가 없는 한…”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이처럼 리버럴한 관점에서 중독성이 적은 마약류에 대해 제재를 완화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인류의 가까운 미래를 보려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가보라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암스테르담의 어느 거리에선 일부 중독성이 적다고 알려진 마약이 합법적으로 거래되고 있다. 또한 알코올과 담배의 위해가 더 크다는 주장도 있다. 중독성이 강한 알코올과 담배를 합법화해 그 판매수입으로 국가나 자본이 부를 축적하면서 일부 중독성이 적은 마약류에 대해서는 과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일견 맞는 말이다 싶지만 과연 그럴까 싶다.

사강의 전제한 ‘타인에게 피해가 없다면’이라는 단서는 유효하지 않다. 마약을 투약하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폐해가 없다는 주장은 넌센스다. 마약의 전이성은 자신은 물론 주변을 물들게 하며 곧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가족이나 지인들을 끌어들인다. 사강의 경우 매우 진보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레퀴엠 포 어 드림’에서 젊은 연인들은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파괴할 자유를 주장이라도 하듯이 ‘하류지향’의 나락으로 돌진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강의 후예들이다. 이른 나이에 성공한 사강은 이후에도 많은 소설을 써서 대중과 소통했다. 그러나 무대 위의 스타처럼, 무대를 내려와야 했을 때의 공허함을 그녀 역시 견디지 못했다. 그녀를 추종한 젊은이들은 사강이 수행한 창작의 행복감과 사회로부터 최고로 인정받는 자아실현의 정점을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타락만을 추구했다. 그렇다면 ‘사강은 유죄’다.

매체에 마약에 대한 소식이 넘쳐난다. 마약 관련한 영화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젠 우리나라도 마약으로부터 청정한 지역이 아니라는 기사도 접한다. 기왕에 톨스토이를 불러왔으니 그의 자전적 소설 ‘안나 카레리나’를 인용하고자 한다. 소설에서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묘사되고 있는 레빈은 귀족이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농민들과 같이 풀을 베면서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경험을 한다. 노동을 통해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경험을 톨스토이는 레빈에 투사해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경험한 일종의 몰입 상태를 예찬한다. 몰입은 나를 잊게 하고 대상세계와 하나가 되게 한다. 분명한 것은 자아의 경계를 넘는 몰입의 경험은 주체적이라는 점에서 마약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그러나 자본이 노동을 소외하면서 노동과 창조적 활동의 합일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포획당한 채 소외돼 왔다.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라는 조언도 뻔해 보여 민망하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몰입의 방법을 진심으로 권한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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