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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죽음의 피, 삶의 땀

[칼럼] 죽음의 피, 삶의 땀

기사승인 2019. 06. 2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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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순국열사라 하고, 생명을 버려 믿음을 지킨 이들을 순교자라 한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린 애틋한 순애보의 주인공들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어렵고 소중한 일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기에 앞서 진정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몸소 애국을 실천하는 일, 신앙을 위해 생명을 버리기보다 먼저 바른 신앙인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일… 이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히거나 순교하고 천당 가는 영광보다 두 눈 부릅뜨고 하루하루를 바르게 살아가는 일상이 더 값진 일일지 모른다.

일제 식민통치 시절, 비분강개해 스스로 목숨 끊는 열사들만 있었고 구차히 살아서 이 땅을 지켜온 민초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우리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있을까? 죽을 때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일 것이다. 나라를 왜적에게 팔아먹고도 모진 목숨 아까워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매국노들은 겨레의 가슴 속에서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온갖 오해와 비난을 무릅쓰고 험난한 삶을 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때는 마땅히 이를 악물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 고통스런 삶이 영광된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일 수 있다. 사기(史記)를 쓰기 위해 궁형(宮刑)의 수치를 무릅썼던 사마천의 삶이 그랬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 가치와 살 이유가 분명히 있기에 어렵고 힘든 고통의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실존적 결단이자 삶의 용기이리라.

일제의 강압에 시달리던 난파(蘭坡)가 울며 겨자먹기로 짧은 몇 곡 끄적거려주고 치욕의 삶을 모질게 견뎌내지 않았던들 ‘고향의 봄’이 온 겨레의 애창곡이 되었을까? 히틀러가 임석한 베를린올림픽 시상대에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 선명한 가슴으로 오르고 나치군악대가 기미가요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마치 그 소리를 제압이나 하려는 듯 경기장 한구석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노랫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선 선수인 김용식 이규환 장이진과 애국가 작곡자인 안익태의 목소리였다. 그 안익태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고,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신문은 친일언론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 엄혹한 세월을 빈주먹 맨몸으로 겪어야했던 옛사람들, 왜인의 말과 글을 쓰며 ‘억지 신민(臣民)’으로 거짓의 시대를 살아야했던 선인(先人)들에게 그 시절을 살아보지도 못한 뒷사람들이 매몰차게 돌을 던진다. 옛 시절의 마지못했던 친일 행적에는 부득부득 이를 가는 사람들이, 일제보다 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을 끈질기게 괴롭혀온 중국이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인 핵무장의 세습독재 북한에는 애써 눈을 감고 입을 닫는다. 대한민국을 세우고 일으킨 어른들에게는 변변찮은 의혹의 흔적이라도 찾아내 친일파의 낙인을 마구 찍어대면서, 대한민국을 붉은 군화로 짓밟은 전범에게는 항일투쟁 경력을 내세워 영웅으로 아니 성인으로까지 떠받든다. 왜곡된 도그마의 일그러진 역사의식일 따름이다.

성을 갈고 이름마저 바꿔야했던 암울한 시절, 일제에 세금을 뜯기고 공물(供物)을 바치면서도 자식 낳아 키우며 부지런히 공부를 시켜온 주름진 어버이들, 그 ‘살아남은 자들의 고뇌’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이 찾아왔겠는가? 자유로운 시대에 태어나 자유롭게 성장한 후손들이 자유 없이 태어나 자유의 그림자조차 누리지 못했던 식민지 백성에게 어찌 섣부른 침을 뱉을 수 있을까? 6월은 보훈의 달,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들을 경건히 추모한다. 그러나 장렬한 죽음보다 치열한 삶이 먼저다. 죽음의 피보다 삶의 땀이 앞서야 한다. 한 번의 장렬한 죽음 대신 기나긴 고통의 생존으로 이 땅을 눈물겹게 지켜온 이름 없는 옛 어른들, 그 고단했던 삶의 땀방울에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의 뜻을 아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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