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가을 햇빛 가득 무말랭이

[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가을 햇빛 가득 무말랭이

기사승인 2014. 11. 14. 08:5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가을입니다. 낮에는 햇살이 꽤 따뜻합니다만, 오늘 새벽녁에는 추워서 잠을 깰 정도로 일교차가 심하더군요. 그래도 여전히 제 출근길인 남산길 은행나무는 노랗게 아름답습니다. 바람 불면 낙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수수 날립니다. 


지난주에 강원도를 다녀왔답니다. 대관령쪽을 다녀왔는데, 길가에 고랭지 배추들과 무들이 김장을 기다리면서 밭에 그득하더군요. 가을무는 보약이라지요. 이제 한창 맛이 들 때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텃밭에서 무를 쑥 뽑아 낫으로 쓱쓱 잘라 주셨지요. 한 입 썩 베어물면 입안에 퍼지던 그 시원하고 단 맛을 기억합니다. 여름 내내 비와 천둥과 바람,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가을빛에 당당하게 맛이 들어가는 무를 보면서, 그때를 추억합니다.


길에 차를 대고 잠시 쉬다가, 무엇인가 농가 평상에 하얗게 널려 있어 가까이 다가가 눈여겨보았더니 평상 하나 가득히 무를 널어 말리고 있더군요. 무말랭이를 만들기 위해 무를 작게 잘라 말리는 중입니다. 하얀 무가 햇빛을 반사하면서 조금씩 말라가고 있더군요. 참으로 눈부신 풍경이었답니다. 어떤 시인은 “납작한 무가 내뿜는 빛이 강렬해서 마치 신성한 제사의 의식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노래했습니다.


무말랭이      안 도  현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어 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꼭 짜버리고/
이레 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해 가을 나는 외갓집고방에서/
귀뚜라미가 되어 글썽글썽 울었다


무말랭이 속에 외할머니가 숨어있습니다. 시인은 가지런하게 썬 무에서 외할머니의 정성을 다시 읽어내고는 슬픔을 마음속에서 꺼내 말리고 있는중인 것 같습니다. 객지에 나가있는 아들들과 손자들을 위해서, 외할머니는 하루 온종일 무를 가지런하게 썰어서, 햇빛에 널어 말리셨지요. 맛이 잔뜩 든 가을무는 하루 온 종일 햇빛도 품고 떨리는 바람도 품고 할머니의 사랑도 품게 되는 겁니다. 꼬들꼬들해진 무는 영판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모습이겠지요. 


학창시절, 저희 집에서도 무말랭이는 인기 있는 반찬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김장을 담그실 때 주로 무말랭이를 담그셨답니다. 그래서 무말랭이를 만들 때는 김장김치를 담그고 나서 남은 양념을 주로 쓰셨는데, 엿물과 검은 참깨를 더해 만드셨지요. 어느 지방에서는 무만으로 무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어머니는 마른 고춧잎을 섞어 무말랭이를 만들어 주셨지요. 좀 더 칼칼하고, 좀 더 맛이 강렬하답니다.


무말랭이를 한 젓가락 씹어 봅니다. 입에 착 달라붙는 것이 참으로 친근한 맛입니다. 칼칼한 양념맛이 먼저 입안을 자극하고 나면, 알맞게 아삭아삭한 무의 식감이 뒤를 잇습니다. 두어번 씹으면, 무의 고소한 맛이 점점 퍼지지요. 자. 무럭무럭 김이나는 밥 한 숟가락에 무말랭이 척척 얹어 함께 먹으면, 밥과 궁합이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없습니다. 달달하고 칼칼하고 들척지근한.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에게 딱 맞는 반찬이지요. 이렇게 맛있는 반찬도 흔하지 않습니다. 무말랭이는 겨우내내 먹을 수 있습니다. 참 맛있었지만  봄이 올때까지 도시락 반찬에 빠지지 않아 솔직히 어떨 때는 조금 지겹기도 했었지요.


무말랭이    정 경화


메마른 입 안 가득 침이라도 고이라고
무수한 주름위로 가을 볕을 담는다
바람의 떨리는 혀가 순례저럼 핥고 간 뒤


그리운 시간들은 왜 자꾸 노래가 되나
뜨락에 멍석 펼쳐 하얀 꽃을 꿈꾸었던
어린 날 두고 온 달 빛 함께 우려 건진다


뒤틀린 상처까지 기슴깊이 안아주마
비로소 남은 뼈마저 누글누글 간이 배면
참바람 휑한 밥상에 되씹히는 가을이 깊다


요사이는 무를 사서 썰어 말리고 어쩌고 하는 게 쉽지 않지요. 다들 너무 바쁘게 사시니 말입니다. 그래도 마트에서 많이 파니까, 오늘 집에 전화해서 저녁식탁에서 무말랭이를 한 번 차근차근 드셔보세요. 햇빛 찬란한 가을날, 하얀 꽃같은 가을무를 평상에서 찬찬히 썰어 말리시던 외할머니, 하얀 무 위에 바람 그득 햇빛 쏟아지던 어린 시절 그 날이 생각나실 겁니다. 그럼 식탁에 가을도, 깊어가겠지요.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