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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긴 겨울밤 잠못 이루고

[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긴 겨울밤 잠못 이루고

기사승인 2014. 12. 2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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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
바야흐로 연말연시입니다. 이제 곧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옵니다. 거리는 흥청망청하고, 각종 모임들로 시끌시끌합니다. 어제는 저도 모처럼 고등학교 때 동아리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만나 송년회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0년도 넘었는데, 학창시절 그 때로 돌아가 수다를 떠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동지가 엊그제이었으니, 요즈음이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때이지요. 요사이는 5시가 약간만 넘어도 날이 어두워지는 것 같습니다. 산골에는 밤이 더 일찍 찾아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긴 긴 겨울밤이라 했던 거지요. 초등학교 시절, 방학때 내려간 외갓집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었답니다. 낮에 썰매도타고 산으로 들로 열심히 뛰어 놀았지요. 동무들과 동네 앞 냇물에 나아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눈 덮인 산으로 토끼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는데, 저녁때 해가 지면 할 게 없더라구요. 외손자 왔다고 할아버지가 아궁이에 불을 때주셔서 절절 끓는 사랑방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화롯불에 군고구마를 구워 먹었지요. 철없이 군밤을 화톳불에 묻어 놓았다가 가끔 군 밤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기도 했습니다.


겨    울     밤                              박 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 집 마당 귀 바람은 잠을 잔다​


조용한 도시의 겨울밤. 이 시를 읽으면 고향집 겨울 풍경이 눈앞에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부엌 처마 밑에 걸어둔 마른 시래기에 싸락눈이 들이치는 소리가 들리고, 초가지붕에 소리없이 쌓인 눈은 드넓은 배추밭, 무밭, 온 논들을 다 하얗게 덮지요. 따뜻한 이불속에서 눈만 내밀고 창 밖으로 보이는 달빛이 얼마나 청량하게 느껴지던지요. 


마당에 추수가 끝난 짚더미, 쌓인 장작위로 휘이잉 부는 칼바람소리도 기억납니다. 한밤중 외할아버지의 잦은 기침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이라도 오면 방 문 열고 나가 "무슨 눈이 이리 밤새 퍼붓는겨" 하며 고무신에 쌓인 눈을 터시는 할머니 모습도 선하게 떠오릅니다.


출출하냐 하시며 할아버지는 바깥에 나가셔서, 쌓인 눈을 걷어내고 무랑 배추꼬리를 한 소쿠리 가져 와서 척척 깎아 주셨지요. 겨우내 땅에 묻혀있던 무는 한 입 베어물면 너무너무 시원하고 감칠맛 납니다. 갑갑한 겨울밤의 지루함을 한방에 날려 주지요. 우걱우걱 베어먹다 보면 혀가 아려오기 시작하고, 결국 저는 무 한 개를 다 먹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냅니다.


배추꼬리를 깎아 먹으면 이게 또 희한한 맛입니다. 약간 달달하기도 하고, 아삭아삭 씹는 맛도 생각보다 아주 좋답니다. 한 개 씩 깎아먹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뭐 그렇다고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지루하기 이를데없는 길고 긴 겨울밤의 무료함을 달래는 데는 최고입니다. 요사이 젊은 친구들은 이 배추꼬리의 참맛을 모를겁니다. 사각거리고 달달하고 씹는 식감 일품인 겨울 밤 간식맛을요.


할머니를 졸라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외할머니는 무릎을 베고 누운 손자에게 잠들 때까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여우가 총각을 홀려 심장을 빼 먹은 이야기부터, 동네 뒷산 공동묘지 사는 처녀귀신 이야기도 해주셨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밤늦게 소변이 마려워 잠을 깬 저는 마당 건너 있는 화장실을 갈까 말까 백번은 망설였을 겁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긴 겨울밤이었지요.


유명한 백기완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지요. "나는 아주 몰락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어. 할머니가 배고프다고 칭칭 대는 나를 달래는 방법이 있었어. 삼태기에 배추꼬리를 담아 와 깎아줬지. 그런데 배추꼬리가 모자랄 만큼 겨울밤이 계속되는 거야. 눈은 내리고 배는 고픈데 밤은 깊어가지. 그럴 때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옛날이야기를 해줬어. 그게 나에게는 소양이 된 거지 뭐.”


언제부터인가 겨울밤이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사회에 나온 이후 늘 바쁘고, 특히 연말이면 송년회다 신년회다 매일 술에 사람에 하루종일 시달리다 집에오면 부족한잠을 자기 바빴거든요. 어쩌다 일찍 퇴근해도 애들과 놀아주지 못하고,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붙잡고 무얼 그리 열심히 했을까요. 아이들은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고 자라지 못했답니다.


문 밖 들판에 우우우 아우성 치며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듣고, 밤에 무서움을 딛고 나간 화장실 위로 둥실 뜬 겨울달도 보아야 하는데. 그게 참 아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TV도 끄고 휴대폰도 안보고, 할머니가 해주신 여우가 총각 심장 빼먹는 이야기를 다 큰 딸내미에게 한 번 해줘 보려고요. 아. 그런데.. 배추꼬리를 어디서 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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