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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새로운 중세기, 화려한 크리스마스

[칼럼] 새로운 중세기, 화려한 크리스마스

기사승인 2017. 12.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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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 우 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숙명여대 석좌교수)
새로운 중세기, 화려한 크리스마스 영성(靈性)이 사라진 자리에 화려한 기복(祈福)의 전당들이 솟아오른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에 성탄절을 맞는 한국 개신교는 과연 개혁된 종교인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삶의 감화(感化)를 주고 있는가. 답은 비관적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바른 길을 걷는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으리라 믿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일부 대형교회의 물량적 성장 추구, 목회세습, 기복적 신비주의 등 비이성적 행태는 5세기 전 유럽의 타락한 종교현상보다 크게 나아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는 개인의 삶에는 물론 나라와 사회에도 빛이 되는가 하면 어둠이 되기도 한다. 종교가 국가공동체의 정신적 등불이 된 나라는 대체로 평안했고, 종교가 타락한 시절에는 나라도 위태로웠다. 특히 한 국가의 멸망에는 그에 앞서 종교의 부패, 영성의 쇠퇴라는 전조(前兆)가 있었다. 유대왕국 멸망 직전의 유대교는 사분오열되어, 사두개파는 정치권력과 야합했고 바리새파는 형식적 율법주의로 백성을 옥죄었으며 에세네파는 금욕적 신비주의로 현실을 외면했다. 종교권력을 거머쥔 세습 제사장들은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를 로마총독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제자들을 탄압하다가 급속히 몰락의 길로 빠졌다.

혹독한 핍박을 이겨내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가톨릭의 사제들은 세속적 특권계급으로 성장하면서 부(富)와 권력에 취해 나라의 위기를 바르게 진단하지 못했다. 그 결과 로마제국 말기의 중세교회는 오랜 십자군전쟁과 호화로운 성당 건축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한편 왕권과의 권력투쟁, 잔혹한 종교재판 등으로 신앙의 본질을 어지럽혔다.

서양의 종교만이 아니다. 북베트남과 전쟁을 벌이던 남베트남은 집권층의 무능과 비리, 군부의 부패와 빈번한 쿠데타, 승려들의 격렬한 반정부시위 등으로 혼란을 거듭하다가 미군 철수 직후 북군의 남침으로 마침내 패망했다. 본의든 아니든, 종교의 극단적 정치행위가 국력 쇠퇴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통일 베트남은 불교를 강력히 탄압했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것은 약 20년 뒤의 일이다.

신라 이래 백성의 칭송을 받아온 호국불교는 고려 중기부터 밀교와 가까워지면서 일탈의 길로 접어들었고, 급기야 요승(妖僧) 신돈의 국정농단으로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는 퇴계·남명·하서·고봉·율곡 등 탁월한 인재들이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나, 피바람 부는 사화(史禍)들로 이어진 사색당쟁이 임진왜란·병자호란의 국란(國亂)을 겪으면서도 파멸적 분열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일제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 프로테스탄티즘의 확고한 기본 명제다. 종교개혁은 어제의 일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의 과제다. 성서의 역사는 끊임없는 개혁의 긴 여정이다. 태초의 천지창조를 기록한 성서가 종말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노래한다. 개혁은 종교의 본질이다.

우리 사회는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외교·경제·문화의 모든 부면에서 일대 혁신이 필요한 총체적 위기에 놓여있다. 북핵 앞에서 벌어지는 여야의 이전투구는 국란 속에서의 당파싸움을 연상시킨다. 불평등과 양극화로 피멍든 경제현실은 혁명 전야의 봉건사회를 보는 듯하다. 안보위기 속에서도 식을 줄 모르는 퇴폐와 향락의 풍조는 멸망 직전의 로마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위기라는 인식조차 없는 정신적 마비상태다. 마비된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 종교의 사명 아니던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 인류역사의 슬픈 경험이지만, 해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개신교가 반개혁적이라는 사실은 기막힌 아이러니다. 종교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다. 초라한 말구유에서 시작된 성탄절을 중세기독교는 웅장한 대성당의 화려한 크리스마스로 변질시켰다. 철학자 베르쟈예프는 ‘21세기에 새로운 중세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또 다른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중세기를 살고 있지 않은가.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흥청거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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