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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핵 협상과 사항계

[칼럼] 핵 협상과 사항계

기사승인 2018. 06. 08.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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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오(吳)의 노장 황개가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몸으로 위(魏)의 조조에게 투항해 온다. 그 전에 조조가 오에 거짓 투항시킨 부하로부터 ‘황개가 대도독 주유에게 반항했다가 곤장을 심하게 맞았다’는 비밀첩보를 받은 조조는 황개의 투항을 곧이곧대로 믿지만, 황개는 방심한 조조 진영을 불길로 뒤덮어 궤멸시킨다. 주유가 황개의 고육책(苦肉策)과 사항계(詐降計)를 함께 엮어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계책이다. 주유는 거짓 투항한 조조의 부하가 보낸 가짜 첩보로 조조를 안심시킨 뒤 총공격을 단행했다. 사항계는 조조가 먼저 썼지만 이를 간파한 주유에게 역이용 당하고 말았다.

20년 뒤, 오의 태수 주방이 위의 대사마 조휴에게 투항한다. 조휴가 짐짓 꾸짖는다. “또 사항계로 우리를 속이려는가?” 그러자 주방은 갑자기 칼을 뽑아 제 목을 찌르려 했다. 조휴가 급히 주방의 손을 붙잡으며 만류하자 주방은 칼로 제 머리털을 잘라 던지며 말했다. “장군께서 나를 의심하니, 부모님이 물려주신 머리털을 잘라 내 충심을 보이려 하오.” 이후 조휴는 주방을 깊이 신뢰하게 된다. 목숨까지 끊으려는데 믿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지모가 뛰어난 사마의도 오의 두 번째 사항계를 알아채지 못했다.

부장인 가규가 조휴에게 조심스럽게 충언한다. “예로부터 이처럼 과장된 행동을 하는 자는 믿기 어렵습니다. 옛적에 요리(要離)가 자기 처자식을 죽이고 제 팔을 자른 뒤 경기(慶忌)에게 거짓 투항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그를 암살했습니다. 주방의 투항도 사항계가 분명하니 믿으면 안 됩니다.” 조휴는 크게 노하여 가규를 죽이려다가 주위의 만류로 그를 살려두고 전장에 나갔지만, 주방의 함정에 빠져 참패하고 만다. 주방의 사항계를 간파한 가규는 바른 말을 했다가 죽임을 당할 뻔한 것이다.

사항계는 정공법과 거리가 먼 간특하고 야비한 속임수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거짓은 항상 진실의 요소를 이용한다”고 갈파했다. 겉만 살짝 도금한 가짜 금반지가 진짜 황금반지보다 더 번쩍거리는 법이다. 거짓이 진실의 요소를 이용하는 방식은 늘 과장되거나 극단적이기 일쑤다. 진실의 속내 없이 겉모습만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눈 밝은 사람은 그처럼 과장되고 극단적인 몸짓에서 거짓을 꿰뚫어본다.

핵보유에서 갑자기 비핵화로 돌아선 북한이 지난달 풍계리 핵실험장의 갱도를 폭파했다. 이 폭파가 핵 폐기의 진정성을 연출하기 위한 과장된 이벤트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10년 전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 폭파도 실은 국제적 압력에 무릎 꿇는 모습을 연출한 사항계에 불과했다. 북한이 과연 ‘완전하고 영구적인 핵 폐기’를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마련인데, 지금 그런 의문을 제기했다가는 당장 죽임을 당할 뻔한 가규 신세가 되거나 전쟁광으로 내몰릴 분위기다. 천안함과 세월호에는 세계적 전문가들의 엄밀한 검증에도 끊임없이 의혹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북한의 진정성에는 일말의 의구심만 내비쳐도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며 비난을 퍼붓는다.

동족이기에 북한정권을 믿어보자는 감상적 선의(善意)는 위험하고 무책임하다. 이미 잠재적 핵개발 능력을 확보한 북한이 경제지원으로 숨통을 튼 뒤에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의심만 하고 앉아있을 만큼 한가한 처지도 아니다. 국제사회가 모처럼 한뜻이 되어 북핵 폐기를 위한 협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비상 국면 아닌가? 이 협상의 성패에 나라의 안위가 좌우된다. 속임수가 예상된다고 해서 협상을 회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협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핵폭탄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두려움 때문에 협상하지는 말자. 그러나 협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자.”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연설 중 일부다.

북의 속임수를 미리 걱정하기보다 그것을 간파하는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 나아가 주유처럼 사항계를 역이용할 줄 아는 도전적 지략이 필요하다. 북핵 폐기를 위한 국제적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반도가 핵의 인질상태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북의 두 번째 사항계를 경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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