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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면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에 다다라 숙연해진다. 안개에 휩싸인 절집 풍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
"자기를 속이지 마라(不欺自心)."
해인사 소리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촉촉이 젖어드는 화두 하나.
밑도 끝도 없이 ‘자기를 속이지 마라’고 하니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자꾸 주위를 둘러보게 돼 새삼 경건해진다.
시오리나 되는 홍류동 계곡 길은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와 함께 마음의 소리까지 들려 5월에 찾으면 오월(吾月)이 열리는 듯하다.
올해는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이고, 부처님 오신 날(28일)을 열하루 앞두고 있어 해인사 가는 길은 다른 때보다 조금 색다르다.
길 위에 있는 데도 자꾸 길을 물으니 이 어리석음을 어디에 내던져야 할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형국이다.
선승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얼핏 해인(海印)이 보일까.
소리길도 좋고, 해인사를 거쳐 백련암을 오르거나 아예 가야산 정상까지 가 보면 스스로 미소 짓는 자신을 만나게 돼 반갑기 그지없다.
‘가야산 호랑이’였던 성철스님의 족적을 따라가 본다.
/합천= 글.사진 양승진 기자 ysyang@as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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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소리길로 포행 나온 스님들. 노송 사이로 연녹색 잎사귀들이 늦은 봄을 알리고 있다. |
성철스님을 친견하기 위해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3000배를 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기가 질려 물러섰지만 끝까지 3000배를 한 사람들은 그를 만났다.
단단히 물어봐야겠다고 죽어라고 절을 하고 스님을 만나면 그냥 웃게 되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겨가면서 마침내 3000배를 하고 나면 뭔가 절값을 뽑아야겠다고 대들지만 사실은 절을 하는 새 그 의문이 풀려 허허 웃고 만다는 얘기다.
합천에는 8개의 테마길이 있다.
‘합천활로(陜川活路)로 이름 붙여져 팔정도(八正道)처럼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정체성을 소생시키고 살리라는 뜻이다. 해인사 홍류동(紅流洞) 계곡을 끼고 가는 길이 ‘해인사 소리길’이다.
총 6km로 7개의 다리와 500m의 데크로 이뤄져 가야산과 매화산의 정기가 모이고, 청아한 계류 소리가 쉼 없이 들린다. 급한 계류는 옆 사람 말소리조차 듣지 못할 만큼 거친 소리를 쏟아내고 소리가 잦아진 듯하면 송홧가루 날리는 노송들이 꼿꼿이 허리를 펴 도보여행자들을 굽어본다.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가야산에 들어와 살면서 자주 찾았다는 이 계곡은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 더 아름다운 길이 됐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노각나무 떡갈나무 때죽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소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류와 함께 연둣빛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해인사 소리길에는 자연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도 함께 흐른다.
가야산 19명소 가운데 16명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낙화암에서 떨어진 꽃잎이 모여 소(沼)를 이룬다는 낙화담(洛花潭)은 봄이 되면 금강산 옥류담이 부럽지 않을 풍광을 만들고, 돌을 첩첩이 쌓아둔 듯해 이름 붙여진 첩석대(疊石臺)도 소리길과 유독 잘 어울린다.
골품제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삶을 마친 고운 선생의 유적을 따라가 보는 맛도 일품이다.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은거하던 농산정(籠山亭), 선생이 가야산에 처음 들어와 시를 지었다는 청량사와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학사대 등이 점점이 이어진다.
전설이지만 소리길 어딘가에서 가야산 산신(山神)이 된 선생을 만날지도 모른다.
가야면 야천리 축전주차장에서 해인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소리길은 축전주차장~농산정(1구간), 농산정~길상암(2구간), 길상암~주유소(3구간)으로 나눠진다.
왕복 5~6시간이 걸리는 길은 3000배를 하듯 오르막 내리막이 겹쳐져 삼라만상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는 모양새다.
걷는 것과 절을 하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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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오신 날을 열흘 남짓 남기고 있어 해인사 대적광전 앞으로는 연등이 빼곡하다. |
해인사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나왔다.
부처의 지혜로 우주의 모든 만물을 깨달아 아는 일이라고 하고, 법을 관조(觀照)함을 바다가 만상(萬象)을 비춤에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이른 아침 해인사를 찾으면 홍류동 계곡에 밤새 비친 수천 수만 가지 형상은 다 떠내려가고 가야산 정상까지는 줄곧 안개가 차지했다. 그 신비감에 휩싸이면 자연스레 옷깃이 여며지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에 서게 된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사찰이다.
통일신라시대 애장왕 때 창건된 절로 7번이나 화재가 나 대부분 소실됐고, 대적광전과 삼층석탑만 온전하다. 팔만대장경판이 옮겨온 후로는 이곳 또한 화마가 비껴가 법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가야산 해인사’라는 일주문에 들어서면 이곳부터는 부처의 땅이다.
봉황문까지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뒤덮고 안개가 스멀스멀거리면 색감이 다른 소나무들이 층층이 포개져 선계를 연출한다. 봉황문, 해탈문을 차례로 지나면 구광루 앞마당에 이어 대적광전 앞에 연등이 빼곡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모습이 중생들의 마음인 양 ‘자기를 바로 보라’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고 있다.
해인사는 50여동이나 되는 전각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갯속에서는 모두 하나가 돼 제 자리를 지킨다.
일주문 옆 한 켠에 자리 잡은 부도 밭은 서릿발 같은 선승들의 가르침이 응집된 듯 모습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부도 밭 뒤쪽으로 화려하지도 , 그리 크지도 않은 현대적인 사리탑이 하나 있는데 성철스님을 모신 곳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스님 음성이 들릴 듯도 한데 범부에게는 ‘산도 물이고 물도 산’이니 이 안타까움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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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암 탑 주위로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운데 행자스님 한 분이 절집을 향해 오르고 있다. |
“성철스님은 아침에 흰죽 3분의 2와 2㎜ 정도로 썬 당근 4조각, 잘게 썬 솔잎 한 숟가락, 쥐눈이콩 삶은 것 한 숟가락이 다였다. 점심과 저녁은 밥 3분의 2와 표고를 우린 국물에 감자 네 쪽, 당근 네 쪽이 전부였다.”
스님의 상좌인 원택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성철스님이 30년이나 주석했던 백련암(白蓮庵) 가는 길은 다 같은 길이지만 또 다른 길이다.
백련암은 가야산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
해인사에서 부도 밭을 조금 내려가다 왼쪽으로 백련암 오르는 갈래가 나타난다. 오르막이라 처음부터 숨이 가빠오는데도 국일암~희랑대~지족암을 지나는 길이어서 숨바꼭질 하듯 절집들이 나타난다. 해인사에서 30분이면 족하다.
산길은 굽이굽이 이어지고 안개에 젖은 길옆 나무들도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다가와 흔들리는 잎사귀들은 누가 오나 내다보는 듯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백련암에 들어서니 천지사방이 꽃이다.
석탑 주위로 흰철쭉과 화사한 진달래가 조화를 이루고 집채만 한 느티나무가 절집을 대변하듯 허리를 곧추 세웠다.
오른쪽 계단 길을 오르면 백련암이라는 일주문이 나오고 요사채로 이어진다.
절집 마당에는 불면석(佛面石)이 있는데 부처님 얼굴 같이 생겨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여 오묘하다. 주변에 기이한 바위가 많고 탁 트인 전망이어서 가야산의 제일 승지(勝地)로 꼽힌다. 절집 좌우로 용각대(龍角臺), 절상대(絶相臺), 신선대(神仙臺)로 불리는 바위가 우뚝우뚝해 장부의 기상을 드러내는 듯하고 암자 뒤편으로 깊이 들어가면 환적대(幻寂臺)도 있다.
여러 고승들을 배출한 백련암은 현재 염화실 좌선실 영자당 천태전 적광전 원통전 고심당 등 여러 당우들이 있다.
고심당(古心堂) 쪽문 앞에 다 닳아 꿰맨 털신이 하나 놓여 있기에 문을 열었더니 한 스님이 3000배를 하느라 성냥개비를 가지런히 놓고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성철스님 좌상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마당에 왜 그리 큰 바위가 있는지 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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