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겨울, 모친상을 당한 한 초상집에 일본의 내로라 하는 위스키 제조업체 사장들이 나란히 모여서 추위도 잊은 채 조문객을 맞는다, 조화를 옮긴다 하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진지한지 마치 생전에 고인에게서 각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사장들이 '집합'한 초상집은 어디였을까. 일본에서 가장 큰 위스키 소매점의 주인집이었다. 소매점이라면 대한민국에서는 이른바 '을(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을'의 상가에 '갑(甲)'인 제조업체 사장들이 모여서 "남의 눈에 좀 극성스럽다 싶을 정도"로 문상을 하고 있었다.
구 회장이 자서전을 쓴 것은 벌써 20년 전이었다. 이 일화를 "몇 해 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소개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갑을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던 셈이다.
자서전에 따르면, 10여 년 전인 1970년대만 해도 소매점 주인들이 제조업체 사장들을 찾아와서 "잘 부탁한다"고 인사할 정도였다. 그랬던 '갑을 관계'가 역전된 것은 소매점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품의 공급이 넘치면서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매점을 확보하지 못하면 제조업체가 살아남기 어려워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갑을 관계'도 변화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 정부가 '갑'에 대한 조사에 나서고, 정치권은 '법'을 만들어 '갑'을 혼내겠다며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부 '갑'의 경우, '갑을'이라는 말을 아예 없애겠다며 눈치를 보고 있다. 술 제조업체 사장이 대리점 주인의 빈소도 찾고 있다.
그러나 '갑을 관계'가 정말로 변하려면 일본처럼 '을'의 영향력이 커질 필요가 있다. 정부와 정치가 만들어주는 변화는 여론이 수그러지면 '원위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