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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사건 총사령 김일성의 죽음

보천보 사건 총사령 김일성의 죽음

기사승인 2015. 03. 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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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5개월 뒤 37년 11월 13일 일만군에 사살,
북한 김일성, 죽은 김일성을 자신이라고 왜곡
보천보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을 시작한 북한 군인들이 보천보와 리명수지구를 둘러보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최대의 항일무장투쟁을 ‘보천보 전투(1937년 6월 4일)’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동명이인(同名異人) 김일성이 총사령으로 이끌었고, 그는 같은 해 11월 13일 일제의 만주군에 사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사건에 관한 함흥지방법원의 재판기록, 국내 일간신문 보도 등 1차 자료의 보도와 사살된 김일성의 친인척 증언 등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보천보 사건을 포함한 혜산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만든 항일민족통일전선체인 ‘광복회’ 조직을 백일하에 노출시켰다. 동북항일연군이 보천보 사건과 같이 국내 진공작전을 벌일 때 길 안내와 습격 지점을 지정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 국내에서 내응하는 조직이 광복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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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부터 1941년까지 중국 공산당과 관련된 항일유격대 조직들. 항일민족통일전선체인 ‘광복회’(보천보 사건의 국내 내응조직) 등 여러 조직들이 망라되어 있다.이 자료는 중국 흑룡강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제의 군경은 이 광복회 조직원을 일제 검거하면서 보천보 사건을 일으키는 등 국경 지대를 소란케 했던 주역 제6사장(第6師長) 김일성의 정체를 파악하게 됐다.

1937년 10월 10일 보천보가 속한 혜산군 경찰서의 수사반 60명은 장백현 17, 18 도강 방면 부락들을 일제히 수색해서 광복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권영벽(權永壁)을 비롯해서 11명의 조직원을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을 통해 광복회의 존재와 그 조직망이 소상히 파악됐다.

일경은 1937년 10월 18일까지 광복회 조직원을 총 501명이나 체포했다. 이것이 이른바 ‘혜산 사건’이었다.

검거된 권영벽(權永壁)·이제순(李悌淳)·박금철(朴金喆)·마동희(馬東熙)·박달(朴達) 등 광복회 간부급을 통해 알아낸 보천보 사건 김일성의 정체는 본명 김성주(金成柱), 나이는 36세(1937년 현재),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 함경남도 태생이었다.

그는 1932∼3년께 소련으로부터 동만주에 들어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대가 성립될 때(1934년) 정치위원으로 시작해 제2군 제3사장이 됐다가 항일연군 제 6사장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이 혜산사건 판결문에는 항일연군 제6사의 보천보 습격과 광복회 조직 진행 상황이 상세히 나와있다. 또 관련자들이 일제의 삼엄한 경비 아래서도 얼마나 공산주의를 위해 용감하고도 치밀하게 행동했는가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이 비밀과 안전을 위해 또 얼마나 무자비한 수법(살인·방화·강탈·납치)을 썼는지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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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함흥지방법원이 작성한 1937년 혜산사건 재판판결문. 유격대 총사령부 총사령 사장 김성주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 김성주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동명이인이다. 이후 그는 1937년 11월 13일 만주 무송현에서 사살된다.
당시 함흥지방법원의 ‘혜산 사건’ 판결문에는 ‘제6사장 김일성(본명 김성주金成柱)’라고만 적혀 있을 뿐 그 밖의 신원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다. 그것은 그가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피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혜산사건 피의자들의 심문조서에는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은 1945년 8월 15 당시 함흥지방법원에 보관돼 있었다.

보천보를 습격한 이 김일성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는 다른 인물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본명 김성주(金聖柱), 당시 나이 25세, 평안남도 출신이다.

제6사장(第6師長) 김일성은 보천보 습격으로 국내에 이름을 떨쳐 만주의 중국 공산당 유격대 속에 있는 한인들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그는 보천보 사건이 일어난 지 5개월 뒤인 1937년 11월 13일에 만주의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무송과 안도의 중간 지점)라고 하는 1000m 고지 산 속에서 부하 100명과 함께 식사를 위해 휴식하다가 일제의 만주군 보병 제7단 제1영의 포위 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를 거두어 가기 위해 항일연군 측은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나 5시간의 교전이 있었으나 끝내 시체를 수용해 가지 못했다. 만주군은 인근 주민들을 불러 얼굴을 보여주고 제6사장 김일성의 시체였음을 확인했다. 검시자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35∼6세로 보이는 얼굴이 작은 장년의 사내였다.

국경지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일성의 죽음은 조선총독부에도 보고됐다. 이에 따라 그의 죽음과 정체를 알리는 기사가 보도됐다. 이 기사들은 혜산사건을 취조한 조선총독부 함경남도 경찰의 보고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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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다룬 국내 신문기사, 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자 조간 7면
1937년 11월 18일자 ‘每日申報’와 ‘京城日報’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여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고 치안을 위협하던 … 지난 13일 만군토벌대는 김일성의 소재를 확인, 이를 공격하여 5시간 교전 끝에 그를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 보천보 습격의 장본인이며 밀림의 영웅같이 동간도 일대를 설치던 김일성이란 어떤 사나이인가. 그의 태생은 혹은 함남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남 출신이라고 했는데 국경경찰관의 조사에 의하면 함남설이 유력하며 그 이상은 판명되지 않는 비적다운 성장 과정이다.

김일성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월경, 동간도를 근거로 00혁명을 일으켜 그의 부친은 그 수령이 됐었다. 00운동이 대안에 확대함에 따라 적색마가 그들 배후에 나타나 공산사상을 선동했다. 적색에 물들은 김일성은 19세 때에 인민전선의 메카, 모스크바에 잠입해 10년동안 그곳 공산대학에서 공부하고, 적위군에 입대해 반일운동의 실천가가 됐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곧 동간도로 돌아와 … 반만항일군을 일으켜 국경선을 휩쓸고 있었다. 밀림 유일의 인테리 김일성은 곧이어 도당의 수괴에 앉혀졌으며 … 금춘에는 함남의 국경 제 2선 보천보를 습격하여 이 때문에 국경선을 사수하던 혜산서 경찰 수명이 희생될 정도였다.

부자 2대에 걸쳐 반만항일을 계속했던 김일성은 토벌군에 쫓기어 드디어 36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의 막을 닫았다.’

죽은 제6사장(第6師長) 김일성의 정체를 확인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의 사촌형 김성보(金成甫)의 체포였다. 김성보는 안도 지방에서 중한반일회(中韓反日會)란 비밀조직을 통해 김일성 부대를 지원하다가 체포됐다. 이로서 제 6사장 김일성(본명 김성주金成柱) 형제들은 ‘성(成)’자 돌림 항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주석 김일성은 본명 김성주(金聖柱), 그의 동생은 김영주(金英柱)로 ‘주(柱)’자 돌림 항열이다.

또 제 6사장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서는 해방 후 만주의 통화 일대의 한인청년들이 죽은 김일성의 추모비 건립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던 일로 확인할 수 있다. 제 6사장 김일성은 바로 통화성(通化省, 만주국 때의 행정구역) 무송현 양목정자에서 죽었던 것이다. 이 김일성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자신이라고 날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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