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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원조 김일성 장군,1923년 7월29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단독 공개]원조 김일성 장군,1923년 7월29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승인 2015. 04. 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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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만주 호령하던 '백마 탄 항일영웅'
일본 육사 기병과 졸, 말 탄 적 없는 北김일성 이미지 도용
98년 정부, 광복 50주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김일성 3차-신문기사
백마 탄 김일성 장군에 대한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당시 창간 3주년을 맞던 동아일보는 기자를 시베리아로 특파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인 김경천(본명 김광서, 1888년생, 2번째 김일성)을 ‘빙설 쌓인 시베리아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 볼셰비키군과 제정러시아군이 벌인 러시아 내전)한 실지경험담 러시아령 조선군인 김경천’이란 제목으로 한면을 털어 인터뷰했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 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5편

북한은 김일성 주석을 ‘전설의 김일성 장군’ 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로 역사를 조작해 왔다. 그 대표적인 조작 중 하나가 ‘백마’다. 김일성 주석이 백마를 타고 항일 유격대를 지휘했다는 주장과 그 그림이다.

이 그림은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런 거짓 주장은 김일성 주석의 날조된 전기에도 빠짐 없이 들어있다. 이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일본 육사 기병과 출신, 2번째 김일성, 본명 김광서, 김경천이란 이름으로 활동)이 흰말을 타고 다녔던 데서 유래했고, 북한은 그 이미지를 도용했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 주석 이전에 존재한 4명의 김일성 중 백마를 타고 다닌 사람은 2번째 김일성이 유일하다. 동북항일연군의 제 6사장 김일성(3번째 김일성)도 제 2방면 군장 김일성(4번째 김일성)도 말을 타고 다니지는 않았다.

본지는 그 백마를 타고 다닌 원조 김일성 장군(2번째 김일성)의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를 입수해서 공개한다. 참고로 이 인터뷰가 작성될 당시 1912년생인 북한 김일성 주석은 11살의 어린아이였다.

1923년 7월29일자 동아일보는 ‘빙설 쌓인 시베리아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 볼셰비키군과 제정러시아군이 벌인 러시아 내전)한 실지경험담 러시아령 조선군인 김경천’이란 제호 아래 한면을 헐어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썼다. 이 기사를 발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 3차-김경천 장군_제공=국가보훈처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경천 장군은 시베리아에서 기병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섬멸해 1920년대 초반 조선민중들에게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란 전설이 되었다.
‘별로 경력이라고 말할 것도 없고 아무 성공도 없는데 특별히 말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 물으신다면 과거경험을 말하지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바와 같이 1919년에 전무후무한 세계적 회의가 열리고 각 약소민족에게도 권리를 준다 하여 우리 동경유학생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발하였소.

이 해 나는 동경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 육사 기병 제1연대사관으로 있을 때라 꿈 속 같이 기쁜 중에도 불 일듯하는 마음을 찾을 수 없었소.

그리하여 병으로 휴가를 얻어가지고 2월 20일에 京城(서울)에 도착하니 도처에 공기가 이상하였소. 그러더니 3월 1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 때 우리 군인 몇 사람은 장래 조선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러시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 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 하고 동지 이청천과 함께 밀의하고…(중략)…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런 후 나는 간도 모 사관학교에 가서 군사를 기르며 시기를 엿보았습니다. 당시 러시아령에는 5,6처에 헤어져 있는 우리 군대가 3,000여명이었소.

다시
김경천 장군이 러시아 볼셰비키 적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 연합군을 섬멸한 이항(지금의 사할린 맞은편 니콜라예프스크). 지도 왼쪽 위 형광펜으로 동그라미 친 지역.
그런데 1920년 3월에 저 유명한 ‘이항(尼港, 지금의 사할린 맞은편 니콜라예프스크 Nikolayevsk)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3월 초 4월에 각처에 헤어져 있던 조선군대와 적군(赤軍, 볼셰비키 군대)이 연합하여 ‘이항’에 있는 일본군대와 백군(白軍, 제정러시아군대)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소,

이 때 군세는 적군의 연합군은 2,000여명이요, 우리 조선군사가 700여명인데 ‘소학령’에는 수천명의 백군과 일본군 800명이 주둔하였었소. 전후 2시간을 총볶듯 싸우는데 이 싸움에 일본군이 200여명 죽고, 적군 속에는 ‘홍가리’군사가 많이 죽었으며 우리 군사는 겨우 6, 7인 전사자가 있었을 뿐이었소. 이 싸움에 우리 조선군이 용맹스럽게 싸운 것은 세계 각국 군사의 경탄하는 대상이 되었었소. …(중략)…

이러던 중 적군과 백군 사이에는 15,6차의 전쟁이 있었나니 이러할 때마다 조선군대도 영향을 입어 일진 일퇴하게 되었소. 이 때 철도와 중요한 길목은 모두 일본군대가 점령하였으므로 우리 군사는 할 수 없이 산에 가서 주둔하는데 할기리죽 몇그릇을 먹고 발을 벗고 누이 길같이 쌓인 산 속에서 지내니 그 고생이 어떠하였겠소.

◇피 맺힌 발자국, 미국 독립군 연상

미국이 독립전쟁을 할 때에 겨울에 맨발을 벗고 얼음 위를 지나가니 얼음에 발이 베지어 발자국마다 피가 흘렀다더니 우리 군사도 이 때 발자국마다 피가 고이었소. 그러나 사람 없는 산천에 보이는 것은 망망한 백설과 하늘 뿐인데 깍아지른 듯한 산을 지날 때에 우리는 佛國(프랑스) 명장 나폴레옹의 알프스산 넘던 행군을 연상하였소. 달 밝은 밤에 눈 위로 행군하는 우리 모양은 완연히 한 예술이요, 그림이었소.…(중략)…

◇6시간의 격전, 백군(白軍)도 떨었다

그 이듬해(1922년) 정월에 백군이 ‘이만’령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적군이 나오나 보다 하고 다시 행군을 하여 나오다가 ‘하바로프스크’에서 홍백전쟁이 있었는데 그 전쟁 중에 나는 백군의 중간 연락을 끊기 위해 ‘이만’에 있는 백군에 총공격을 시작하니 그 때는 정월 2일이라 제일차로 백군이 수백명 죽고 대략 6시간 동안 격렬히 싸우는데 백군은 대포를 걸고 내리다 질러서 탄환이 우박 쏟아지듯 하였소

조선군사가 싸움 잘 합디다. 이러하자 미비로 훈련이 부족하고 기계가 불비하였건마는 빠뜩 악을 쓰며 싸우는데 놓는 방마다 그 큰 아라사 군사가 떨어지지 않을 때는 없었소. 이리하여 아라사 군사가 이 때는 조선군사라면 떨게 되었소. 그들의 말이 ‘적군뿐이면 보잘 것 없는데 그 눈까만 놈들 때문에 결단이다’고 하였었소.

◇적군까지 총지휘, 일시 ‘이만’ 점령

이 때 적군 사령관이 백군에게 항복하여 그리고 가서 붙었으므로 적군의 일부를 내가 지휘하여 싸우게 되었는데 이 때 나는 악에 받친 사람이라 탄환이 비 쏟아지듯 하는 속에 말을 타고 서서 지휘하는데 백군들이 대포를 놓다가 불빛에 나를 보고 ‘꺼리에츠(고려인)’란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는 자가 있었소.

이리하여 ‘이만’은 완전히 점령하였으나 이 때는 적군의 힘이 약할 때라 약 200여명의 우리 군사로 백군 700여명이 지키는 곳을 점령하기는 하였으나 배후에는 일본 군사가 있는 터이라 오래 지킬 수가 없어 다시 퇴거하였소.

김일성 3차-김경천 장군 일가_제공=국가보훈처
김경천 장군의 자녀들, 왼쪽부터 장녀 지리, 외아들 기범, 막내딸 지희, 차녀 지란. 러시아 동포인 자녀들 가운데 1998년 8월 15일에 아들 기범씨와 막내딸 지희씨가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내한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아갔다.
◇19세 기병의 대담한 행동

1922년 즉 작년 3월 중에 ‘약콜리가’로 백군이 집중하매 우리 군사는 적군과 연합하여 공격하였더니 백군은 ‘소학령’으로 쫓겨 갔소. 그 후에 일본군이 철병(撤兵)하게 되매 백군은 우리나라 있는 쪽으로 퇴거할 듯 하므로 나는 이것을 추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데리고 일본 경계선을 돌파하고 ‘취풍’으로 나오니 이것은 범의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장쾌한 모험이었소.

불빛이 번히 비치는 일본 보초병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흰말을 포장으로 덮어서 강을 건너는데 강에 오매 배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었소. 마침 19세 먹은 소년기병 1인이 자원하고 강 위에 가로 질린 철사에 매어 달리어 십여간이나 되는 강을 건너가서 배를 가지고 와서 전 군대를 건너게 하니 이 때 발각만 되면 몰살이라. 더욱 소년을 구사일생의 경우에 보내고 매우 염려되었었소. 건너간 후 그날 밤으로 ‘취풍’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소. 그런 후로 실전한 경험은 별로 없었소. ’

이 인터뷰 기사를 실은 동아일보는 1920년 경신년 4월 1일 송진우, 김성수, 유근 등의 주도로 ‘민족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며 창간되었다. 창간 3주년 즈음인 1923년에 동아일보가 기자를 직접 시베리아로 보내 1면을 헐어 인터뷰를 실은 것을 보면 김경천이란 인물이 당시 얼마나 우리 민족에게는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김경천 장군은 시베리아로 직접 찾아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시베리아의 별’ 이란 자작시를 직접 전했다. 김경천의 독립에 대한 절절한 충정이 묻어난다.

시베리아의 별!

뜬 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별
칼을 짚고 홀로 서서
흰뫼 저편을 바라보니
사랑하던 무궁화는 희미하고

자유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애처롭다.
뜻이 열 곳이 없으므로
흑룡수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

김 장군은 이후 일본군에 대항해 연합해서 싸우던 러시아 볼셰비키 군대에 배신당하고 무장해제된다. 이후 1937년 카자흐로 강제이주된 뒤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1942년 구소련 북동쪽의 아르항겔스크주 감옥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기록을 러시아 현지에서 찾아내고 광복 50주년을 맞던 1998년에 남은 자녀들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이런 원조 김일성 장군의 항일투쟁들을 모두 자신의 투쟁이라고 날조하고 그 이미지를 도용하고 있다. 이것이 본지가 ‘김일성 바로 알기’연재를 계속하는 문제의식이다. 광복 70년이 가기 전에 이런 거대한 역사 왜곡의 덩어리들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이런 날조의 덩어리들이 자칫 기정사실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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