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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주의 그때그시절 IT] ② ‘삐삐 3인방’을 아시나요?

[박영주의 그때그시절 IT] ② ‘삐삐 3인방’을 아시나요?

기사승인 2015. 10. 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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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박병엽 부회장(팬택), 김동연 부회장(텔슨전자), 이가형 사장(어필텔레콤)
 IT/모바일 업계를 그래도 오래 겪은 사람이라면 박병엽, 김동연, 이가형 이른바 ‘삐삐 3인방’을 기억할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아픔이지만, 어떤 이에겐 그저 향수로도 기억되는 이름들이죠. 삐삐(무선호출기)로 성장해 휴대폰까지 섭렵, 한때 ‘기린아’로 부상했던 이들입니다. 시티폰의 아픔을 딛고 당시 CDMA 휴대폰으로 성장신화를 썼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금도 ‘따로또같이’ 회자되곤 합니다.
물론 이 중 가장 오래 남았던 것이 전 회([박영주의 그때그시절 IT] "LG가 내 뒤" 팬택 전성시대)에서 언급했던 팬택의 박병엽 부회장입니. IT/모바일 업계를 떠났거나 살짝 발 담그고 있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박 부회장은 2013년까지 한때 ‘세계 5위’의 휴대폰 업체(팬택)를 진두지휘했고, 지금도 IT 현업(팬택씨앤아이 등)에 남아, 간혹 입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누구와도 10분 안에 형동생 한다’는 엄청난 친화력을 자랑하는 게 박병엽 부회장이라면, ‘결정하면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저돌적인 추진력은 김동연 회장을 대표합니다. 반면 이가형 사장은 ‘선비와 같은 부드러움’을 앞세워 박 부회장과는 또 다른 친화력으로 조직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죠.

이들 세 사람이 무선호출 업체 팬택(박병엽)과 텔슨전자(김동연), 어필텔레콤(이가형.설립 당시 엠아이텔)을 설립한 게 각각 91년 3월, 92년 3월, 94년 8월입니다. 김동연, 박병엽 두 사람은 1987년 당시 ‘그때는 잘 나갔던’ 무선호출기 제조업체 맥슨전자의 영업부 과장과 신입사원으로 함께 근무한 이력도 있구요)

어필텔레콤이 내놓은 '어필PCS'는 당시 80g대 벽을 깬 휴대폰으로 엄청 인기를 누렸다. 안재욱이 모델이었다.
먼저 가장 늦게 무선호출 사업에 뛰어들었던 어필텔레콤 이가형 사장. 무선호출기 시장의 ‘어필(Appeal)’ 돌풍을 고스란히 휴대폰으로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1998년 5월초 내놓은 무게 79g의 세계 최소형·최경량 휴대폰 ‘어필PCS’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이후 휴대폰의 경량화 경쟁을 촉발시키기도 한 이 제품은 당시 안재욱을 홍보모델로 내세웠죠. 당시 LG텔레콤 전용모델로, 2년 약정에 구입가는 12만원이었다는군요.

1997년 말 기존 ‘셀룰러’ 사업자로 SK텔레콤(옛 한국이동통신. 식별번호 011)과 신세기통신(017)이 경쟁하던 국내 휴대폰 시장에 새로 PCS 사업자 3인방(한국통신프리텔, 한솔PCS, LG텔레콤)이 등장해 5개 업체가 경쟁하게 됐죠.(셀룰러 서비스는 800~900MHz, PCS는 1.7~1.9GHz…, 한솔PCS의 당시 슬로건 ‘원샷 018’은 지금도 현업에 있는 누군가가 술 자리 건배사로 외친 게 채택됐다…, LG텔레콤이 신규가입자 1위 할 때도 있었다…, 뭐 이런 얘기는 나중 다시 기회 있을 때.^^;;) 여하튼 이후 신세기를 SK텔레콤이, 한솔PCS를 KT프리텔이 ‘먹어’ 오늘날 3파전으로 고착화됐습니다.

당시 CDMA 시장 대응이 늦었던 모토로라(지금의 모토로라가 아니다. 격세지감!)가 1998년 말 어필을 약 600억원에 인수(지분 51% 확보)한 것도 이러한 기술력을 탐냈기 때문입니다. 어필 입장에서야 모토로라를 등에 업고 수출시장 공략을 병행할 수 있으리란 판단도 했죠. 하지만 당시 선택에 대해 후에 이가형 대표는 ‘아쉽다’는 반응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후 99년 100대 중소벤처기업 중 매출 1위 등 승승장구하면서 2002년 매출 6883억원, 영업이익 1008억원, 순이익 780억원을 달성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2003년 초 “올해 매출목표 1조5000억원으로 휴대폰 중견업체 처음 1조원을 넘어설 것”이라던 이 대표의 호언장담은 바로 그 해 5월 이 대표가 모토로라와의 알력싸움 끝 회사를 떠나면서 허언이 됐습니다. 모토로라와 함께하는 동안 ‘어필’ 브랜드를 잃은 데다, 더딘 결정력으로 급변하는 시장에 제대로 대응 못한 모토로라의 판단도 한 몫 했다는 평가입니다. 어필텔레콤은 2005년 1월 모토로라코리아에 흡수합병되면서 휴대폰 역사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모토로라에 인수된 지 6년만이죠.

‘핸썸한’ 외모에 노래도 잘하는(그는 가수 지망생이었습니다) 자랑하는 텔슨전자 김동연 부회장(그는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을 ‘회장’으로 모시며 자신은 부회장직을 고수했구요)의 통신업계 잔뼈는 맥슨전자에서 근무한 12년간 굵어졌습니다. 91년 맥슨을 그만 둔 건 아버지 병 간호 때문으로, 병 간호가 길어지면서 아예 독립해 창업의 길을 걷게됩니다. 자본금 1억5000만원으로 텔슨을 설립한 게 92년 3월이죠.

텔슨의 입지를 굳힌 건 ‘광역삐삐’였습니다. 1994년 10월 텔슨은 국내 처음 ‘전국 어느 곳에 가도 호출을 받을 수 있는’ 광역무선호출기 ‘왑스(WAPS)’를 개발합니다. 가령 부산 거주자가 서울에 와도 지역별 주파수자동설정 기능을 통해 삐삐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죠. 당연히 이 제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텔슨을 업계 우뚝 세우게 됩니다. 텔슨은 앞서 계산기 겸용 무선호출기, 피라미드형 전화기 ‘소나타’ 등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해 기술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휴대폰 사업에 뛰어든 텔슨 역시 손 잡은 건 모토로라였습니다. 어필이 내수용 단말을 공급했다면, 텔슨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의 공급계약을 체결, 해외 시장을 공략했습니다. 모토로라의 첫 CDMA 휴대폰은 이렇게 텔슨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2000년 6월에는 노키아와도 손을 잡게 됩니다. 국내 CDMA 시장 공략을 위한 것이었는데, 노키아와의 ‘롱텀 파트너십(Long-Term Partnership)’은 결과론적으로 텔슨에게 약인 동시에 독이 됐습니다.
텔슨전자가 내놓은 일명 워치폰. 당시 중국에서 '없어 못팔' 정도였다고.
텔슨전자의 초기 제품 중 각광 받았던 것은 한국통신프리텔(현 KT)에 공급했던 폴더형 휴대폰 ‘네온’입니다. 중국 시장에 공급했던 일명 워치폰(모델명: TWC 1150. 작금 ‘스마트워치’ 일종)도 텔슨 기술력 과시 사례로 왕왕 거론됐죠. 당시 한 보도에 따르면 이 제품은 ‘최초의 동기식 2.5세대 이동통신(cdna2000 1x) 기반 손목시계형 휴대폰’으로 중국 내에서 '없어서 못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네요.

당시 세계 휴대폰 1위 노키아의 한국 철수는 텔슨의 여러 고비 중 최대 위기로 돌아왔습니다. 막대한 투자를 했던 중국 시장도 2003년께 중국 시장의 포화와 함께 사스 충격으로 위기를 더했구요. 결국 “2010년 연 매출 300억 달러를 창출하는 모바일 멀티미디어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겠다”던 텔슨전자는 이 여파를 못 견디고 2004년 9월 최종 부도에 이릅니다. 92년 3월 자본금 1억5000만원으로 20여평의 봉천동 사무실에서 시작했던 ‘김동연의 텔슨 신화’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회사 청산 과정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직원들과의 개운하지 않은 결말은 흠으로 남았죠. 그 후유증인지 2000년대 말 병원 신세도 졌습니다. 2004년 김 부회장은 와이파이 기반의 위치 추적기 ‘마이마이’를 개발한 ‘예공’의 회장으로 등장합니다. 이력에는 ‘현 한국금융플랫폼 회장’도 더해졌구요.

잘 알려진 것처럼 ‘삐삐 3인방’의 마지막 ‘형님’으로서 팬택의 박병엽 부회장의 회사 경영은 더 드라마틱했습니다. 29세 때인 1991년 3월 10평 짜리 집 담보 대출금 4000만원으로 시작됐다는 그의 지난한 성공 신화는 지난 2013년 9월 결국 회사를 떠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2007년 4월 1차 워크아웃을 5년만에 졸업한 박 부회장이었지만, 2012년 이후 ‘삼성 Vs. 애플’의 스마트폰 양강 구도 등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은 못 견딘 셈입니다.

팬택의 시작 역시 무선호출기였습니다. 1994년 국내 최초 문자 호출기, 2005년 음성 호출기·광역 호출기를 개발해 시장을 이끌었죠. 역시 어필·팬택과 비슷한 98년 CDMA 휴대폰 사업에 뛰어듭니다. 그해 5월 모토로라의 지분 투자 역시 회사 성장의 동인이 됐습니다.(이들 삐삐 3인방 모두 ‘모토로라’를 통해 성장했다는 게 공통분모. 첫 CDMA  상용 국가로서 한국 단말 제조사가 갖는 CDMA 기술력을 당시 GSM 올인으로 CDMA 대응이 늦었던 모토로라가 끌어안은 결과죠. 지분 20%만 모토로라에 내준 팬택과 지분 51%를 허락한 어필의 ‘선택’에 따른 결과는 두고두고 회자됩니다.)

박 부회장이 몸 담았던 23년간 팬택도 부침이 많았습니다. 휴대폰 시장 초기,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 공급업체에서 자체 브랜드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을 가져간 것 역시 일종의 승부수였습니다. 현대전자 휴대폰 계열사였던 현대큐리텔 인수(2001년 말)와 SK텔레콤 휴대폰 부문인 SK텔레텍 인수(2005년 7월)는 박 부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인수 사례로 꼽히죠. 덩치를 키워 시장점유율을 높인 빅딜이었지만, 결국 유동성 위기를 초래해 2007년 4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건 아쉽습니다.

(큐리텔 인수와 관련된 일화. 당시 그는 이를 회사 돈 아닌 개인 돈으로 인수했습니다. 모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던 건 당연지사. 한 인터뷰에서 박 부회장은 “내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그렇게 했다”는 답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박 부회장의 통큰 결단의 한 사례로 볼 수 있죠. 일견 성공하기도 했구요.)

팬택이 다시 빛난 건 워크아웃 기간 18분기 연속 영업이익을 실현하면서 4년 8개월만에 워크아웃 종료를 이끌어낸 지난 2011년 12월이었습니다. 이때 박 부회장이 전날 전격 사퇴 카드를 꺼내든 것 역시 ‘독한 승부수’라는 평을 얻었죠. 팬택의 워크아웃 졸업에 대해 채권단 의견이 엇갈리자,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고, 이게 먹혔습니다.(박 부회장의 친구인 김광현 한국경제 IT 전문기자의 ‘심야 전격 인터뷰’가 화제가 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 "물어보고 싶어, 최고 제품 만들려고 피 토하고 울어봤는지…")

그러나 이후로도 팬택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2014년 도입된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말기 유통법)’도 회사 입장에서는 악재였다는 평이구요. 2013년 9월 24일 박 부회장은 채권단을 찾아가 사의를 표명합니다. 경영상태 악화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죠. 팬택을 창업한 지 23년 만입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팬택은 다시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됩니다. 1차 워크아웃을 졸업한 지 2년 2개월 만이구요.

박 부회장은 현재 ‘팬택C&I’, ‘라츠’ 등으로 왕왕 이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재기를 도모한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법정관리 중인 팬택 인수를 추진해 온 쏠리드-옵티스 컨소시엄은 지난 8일 인수대금 납입을 완료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는 16일 팬택의 제2차 관계인집회의 승인만 남겨놓은 상태. 부결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입니다. 기사회생한 ‘뉴’ 팬택과 박 부회장은 그렇게 다른 길을 갑니다.

[진화는 역사를 먹고 산다. 이 당위가 맞다는 전제 아래 새로 '박영주의 그때그시절 IT'를 시작합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부침이 많은 한국 IT/모바일 역사입니다. 오늘 없는 어제 서비스도 많습니다. '모토로라로 시작해 아이폰으로 귀결된' 휴대폰 '오늘'도 내일이면 어제가 됩니다. 들여다보면 '역사'에서 재미만큼 배울 것도 많습니다. '그때그시절'을 통해 우리 IT/모바일의 내일을 만나보자는 역설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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