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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 아마복싱의 살아있는 전설 조철제 회장의 이야기

[조영섭의 복싱비화] 아마복싱의 살아있는 전설 조철제 회장의 이야기

기사승인 2019. 05. 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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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이한성 대표팀 코치와 조철제 회장(우측)
이한성 전 복싱 대표팀 코치와 조철제 회장 /조영섭 관장
올해는 전국체전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비적인 해다, 더욱이 수도 서울에서 대회가 개최되기에 뜻 깊다. 지난달 한국체대에서 개최된 전국체전 서울 선발전에 참관했다, 이곳에서 아마복싱의 살아있는 전설 조철제 원로회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한국복싱의 흥망성쇠를 현장에서 목도한 몇 안되는 복싱인 중 한명이다, 1935년 서울 청량리에서 태어난 그는 이한성과 죽마고우였다. 이 두 사람은 조선시대 오성과 한음 같은 사이였다, 편의상 존칭은 생략한다, 1970년대부터 조철제가 복싱협회 전무와 부회장등 요직에 포진되어 한국 아마복싱을 쥐락펴락 할 때 이한성은 신한체육관에서 박찬희, 김정철, 박인규, 임병진 등 스타급 복서들을 육성해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이들은 자연스레 성골(聖骨)이라 불린 조철제 사단의 일원이 됐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선발전에서 LF급의 박찬희와 F의 김정철이 난적 김치복과 유옥균을 잡으며 국가대표에 발탁되자, 이한성은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합류했고 영어에 능통한 조철제는 형식상 회의대표로 참관했으나 사실상 최고 수장으로 선수단을 총괄했으니 기막힌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랴.

서울시립대 재학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한 조철제는 복싱과 인연이 된 것은 뜻밖에도 조 회장의 처할아버지가 그 유명한 강낙원씨였기 때문이다. 강낙원은 1934년 조선아마츄어복싱연맹을 발족할 때 성의경 이혜택 등과 함께 산파 역할을 한 한국 복싱의 원조였다. 이를 계기로 조철제는 복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56년 군 생활을 할 때는 MIG 군사정보 부대에 복싱부를 창설, 전양옥 이용길 등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후 1974년부터 아마복싱 최일선에서 숱한 사연과 비화를 양산해냈다.
사본 -아마복싱계에 살아있는 전설 조철제 회장
아마복싱계에 살아있는 전설 조철제 회장 /조영섭 관장
1974년 테혜란 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의 F급의 구영조가 필리핀의 아로살과 대결할 때 그의 첫 비화가 시작된다. 당시 부심을 보던 조석인은 양 선수가 우열을 가릴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접전을 펼치면서 3회전이 끝나자 난감한 표정으로 조철제를 바라봤다. 조철제는 북한선수에게 승점을 주도록 시그널을 보냈고 결국 구영조는 3-2로 극적인 승리를 챙겼다. 당시 남북 관계는 북한선수가 개회식에 입장할 때 TV화면을 비추지 않을 정도로 경색되었던 시기였다, 결승에서 황철순을 잡고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미국의 찰스 무니를 꺾고 밴텀급에서 북한 복싱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영웅이 됐다.

1977년 제3회 킹스컵 대회에서도 조철제의 무용담은 시리즈로 펼쳐졌다. F급에 출전한 박찬희가 태국의 파용 분인에게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음에도 2-3으로 판정이 뒤집어지자 대한체육회 김택수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설명을 한 후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예상 외로 큰 파문이 일자 박근 태국대사가 부랴부랴 김택수 회장 에게 연락해 양국 간에 우호관계에 금이 갈 우려가 있으니 대회 보이콧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지만 조철제 회장의 성품을 인지한 김택수 회장은 기각시켜버렸다. 7개월 흐른 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제8회 아시아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B급에 출전한 황철순은 북한의 정조웅에게 판정승하자 이번엔 북한팀에서 지난번 한국팀처럼 선수단을 철수시키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정조웅은 후에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권현규를 잡고 라이트급에서 우승한 바로 그 복서다. 한국 언론에서는 북한이 생트집을 부린다고 보도했지만 실상은 황철순이 밀린경기를 했고 그 중심엔 조철제가 있었다. 당시 최고의 빅카드로 꼽혔던 페더급의 구영조와 일전을 눈앞에 둔 유종만(원광대)은 결국 부전승을 거뒀고 결승에서 KO승을 기록한 유종만은 대회 최우수복서로 선정되었다. LM급 국가대표 이자 대표팀 주장인 박일천은 당시 유종만의 기량은 대표팀 주축선수 중 가장 안정된 전력을 지닌 최고의 복서라고 말하며 구영조와 일전도 해볼만한 대등한 실력이라고 평했다.
사본 -조철제 (좌측)회장과 WBC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
조철제 회장과 WBC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 /조영섭 관장
그 해 벌어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미들급에 출전한 장영철이 북한선수에게 패하자 현 북한 IOC위원인 장웅이 링위에서 승리의 세레모니를 연출하며 내려오자 그의 행동을 지커보던 조철제는 장웅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한방을 날려버려 경기장을 일순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 1979년 제1회 월드컵대회에서 은메달 2개를 획득하며 혁혁한 성과를 창출하자 대뜸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에게 선수단의 전지훈련 지원비 5만달러를 받아 멕시코로 훈련을 떠났다. 이후 현지에서 아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그곳 선수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훈련을 하면서 경비가 비축되자 지원금 5만달러 전액을 발전기금으로 복싱협회에 반납했다, 이 돈과 1981년 한일 국가대항전때 받은 김유현의 격려금 700만원이 합해져 1982년 5600만원의 기금이 탄생했고 이 시드머니는 1997년 김승연 회장이 퇴임하면서 김운용 회장에게 인수인계 할 때 16년동안 17억 6000만원 으로 불어났다. 현재도 19억원을 유지하고 있는데 잘 관리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기금으로 불었을거라 말하며 여운을 남겼다. 1981년 1월 일본에서 개최된 한일 국가대항전에서도 드라마틱한 비화가 탄생했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당시 경기에서 LH급의 김유현은 2회에 라이트 일격으로 사토를 통타하자 상대는 실신해 결국 엠뷸런스에 실려갔다.

그때 한 후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대뜸 조철제 회장에게 선수단 회식을 제의했지만 조 회장은 지금은 선수들이 체중조절을 한 상태이므로 귀국해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하며 헤어졌다. 추후에 약속장소인 무교동의 일식집에 도착한 30명에 육박하는 복싱인들은 후원자가 마련해준 만찬을 즐겼다. 후원자는 조철제 회장에게 김유현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면서 일금 1000만원을 쾌척했다. 식대비 230만원을 제외한 돈을 김유현에게 전달하자 김유현은 한사코 사양해 결국 조회장은 700만원 남짓한 돈을 복싱기금으로 입금시켰다. 이 비화는 당시 사회를 맡은 박형춘 사무국장의 전언이다. 후원자는 자신이 태권도 유단자라고 말하며 복싱협회 회장도 염두에 둔 발언도 하는등 달변가 였다는 후문이다. 그가 바로 삼우트레이딩 대표인 유병언이었다. 유병언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핍박을 많이 당해 가슴에 응어리가 뭉쳐있었는데 그 울분을 김유현 선수의 KO승을 통해 한방에 날려 버렸다며 감사한 마음에 이렇게 자리를 했다고 말했다,
사본 -1978년 아시아선수권 최우수복서 유종
1978년 아시아선수권 최우수복서 유종만.김승미 전 대표팀 감독 .조철제 회장(왼쪽부터) /조영섭 관장
역사적 정치적 평가를 떠나 그가 복싱에 사랑과 관심을 보인것은 사실이다, 후에 유병언은 LF급 세계랭커인 김치복 선수의 경기 때 대회장을 맞아 후원했을 정도로 복싱에 애착을 보였다.

복싱원로 조 회장은 얼마 전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김형규, 김인규 두 복서에게 단말마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최선을 다해서는 이길수 없다. 사력을 다해야한다. 육체와 육체가 부딪쳐야 하는 권투는 강한 근성이 요구되기에 눈빛에서 살기가 있어야 한다”고 훈시했다. 팔순을 훌쩍 넘은 조철제 회장의 복싱에 대한 열정에 자리한 모두 숙연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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