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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숨 쉴 공간’에 대한 단상

[칼럼]‘숨 쉴 공간’에 대한 단상

기사승인 2020. 07. 2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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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현직 경기도지사의 허위사실공표 혐의에 관한 재판이 최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됐다. 대법원장이 직접 낭독한 판결문에는 특별한 문장이 포함됐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생존에 필요한 숨 쉴 공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한편에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법의 잣대가 들쭉날쭉하고 공정한가에 대한 문제로 사법부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시점에서, 일부 여론에선 인공지능(AI)에게 판결을 맡기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시기 새삼 법적용에 있어서 개별사건에 대한 맥락과 그 해석에 대해 인간적인 고민과 여지가 중요하다는 사법부 나름의 논리가 있지는 않았나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SF영화처럼 근 미래에 정말로 AI가 판결하는 상황을 그려보자. 완벽할 것 같은 시스템의 해석을 피해가는 방법을 계산해내는 카운터-인공지능프로그램이 출몰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모든 주어를 생략할 것, 혹은 진술은 인용문으로만 할 것, 일괄되게 말과 행동을 반복할 것 등, 알고리즘이 요구하는 충분한 조건을 만족하는 서류와 증빙자료를 마련해주는 디지털 변호인단이 꾸려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이런 세계를 디스토피아라고 한다. 영화 ‘터미네이터 3 - 라이즈 오브 더 머신’에서 미래를 구하기 위해 파괴해야할 국방성의 슈퍼컴퓨터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이미 일상에 포진한 거대한 네트워크가 망으로 연결된 ‘스카이 넷’이 인간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주변에 널려 있는 PC들의 망을 통한 기계의 공격으로 인류가 파멸을 맞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고민하는 윤리적 존재로서 인류는 위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AI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숨 쉴 공간’이라는 은유를 사용한 판결자체가 미래사회의 우리 역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다뤄질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가혹한 공권력 앞에 숨을 쉴 수 없다는 호소를 하다 죽은 미국의 흑인남성 플로이드 사건은 끝내 폭동사태로 비화됐다. 지나치리만큼 매뉴얼에 집착한 백인경찰의 공권력행사로부터 기인한 비극은 미국사회 전반에 균열을 발생시켰다. 은유로서의 숨 쉴 수 없음이 아니라 실제 공기를 흡입할 수 없다는 긴박한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수많은 자영업자들과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노동자들이 숨 쉴 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이젠 SOC사업 등 추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방식이 아닌, 소비자와 소상공인들을 직접적으로 매개하는 형식의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질 때가 아닌가 싶다. 재난소득으로 명명된 1차 집행을 통해 많은 이들이 숨통을 틀 수 있었다고 반겼다.

그런데 도심여기저기에서 도로를 뜯고 각종 설비시설을 정비하는 일이 흔하게 목격된다. 혹여나 교체시기가 채 안되었는데도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벌이는 공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더 이상 형식을 위한 형식이 아닌, 상식에 기초한 정책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는 방법으로서 기본소득이 아닌가 한다. 경제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분명한 대안이지 싶다.

한편 아이러니컬하게도 코로나 사태는 봄철 미세먼지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했다. 코로나로 숨이 막혔지만 탁한 대기로 인해 고통 받지는 않았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한국에서 유독 흥행한 이유가 과학적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민한(?) 국민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코로나 사태 이전 미세먼지와 스모그로 가득 찬 서울의 봄날과 인터스텔라의 풍경이 중첩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현실로 다가왔다는 말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더, 과거 유신정권이 강제한 그린벨트는 많은 이들의 재산권을 침해한 조치였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수도권에 허파를 제공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새옹지마도 이런 새옹지마는 없다. 칼럼을 쓰는 동안, 정부가 그린벨트 해제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래세대를 위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듯싶어 다행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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