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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영화 ‘언노운 걸’, 양심이란 이름의 고통

[칼럼]영화 ‘언노운 걸’, 양심이란 이름의 고통

기사승인 2020. 09. 0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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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사실주의 미학의 구도자’.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감독(장-피에르, 뤼크 다르덴)에게 어울림직한 표현이다. 이들 감독은 미니멀리즘적인 형식 속에, 인간 본성의 확장으로서 사회제반의 부조리들을 솜씨 있게 다룬다.

이들의 2016년 작 ‘언노운 걸(The Unknown Girl)’은 ‘양심’에 대한 영화다. 모티브는 흥미롭다. 의사 제니는 앞날이 창창한 인재다. 의사의 병가로 휴진해야하는 동네 의원에서 임시로 일을 한다. 환자들을 극진히 돌보고, 실습 나온 인턴을 꼼꼼히 챙기는 그녀는 한 마디로 성실한 의료인이다. 이 일이 끝나면 명문의료센터에서 임상의로 일할 기회도 주어져 있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한다. 어느 날 저녁 업무가 끝나고 인턴과 상담하던 중, 다급히 벨이 울린다. 병원 문을 닫은 지도 한 시간이 지났고, 때마침 환자의 고통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인턴을 꾸짖던 시점이라 제니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응급상황일 수도 있기에 방문자를 돌보았을 그녀다. 하지만 나약한 심성의 인턴에게 환자의 상태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면 냉철한 진단을 내릴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던 터라 단호하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외면한다.

그런데 다음 날 경찰이 찾아온다. 근처 공사장에서 흑인소녀의 변사체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거리에 설치된 CCTV에 소녀가 병원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이 찍혀 조사를 나온 것이다. 뜻밖의 소식에 제니는 감정이 격해지고 급기야 눈물을 쏟아낸다. 그 때 문을 열어주었다면 죽은 소녀는 지금 살아있을 것이라고 자책한다. 경찰은 죽은 이가 아픈 데가 있어 병원을 찾은 것 같지는 않고, 무언가 쫓기는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고자 때마침 대기실에 불이 켜져 있던 병원을 들른 것 같다고 말하며, 너무 자신을 책망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그녀의 심연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한다.

마음을 추스른 의사 제니는 죽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고자 경찰에 전화를 한다. 하지만 이름조차 알 수 없다는 이야기만을 듣는다. 영화 후반부는 ‘이름 없는(unknown)’ 소녀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여정이다. 제니의 탐문을 쫓아가다보면 우리는 ‘양심이란 이름의 고통’과 조우하게 된다. 미스터리한 흑인소녀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양심의 가책에 고통 받는다. 자기변명과 합리화로 진실을 말하길 피하고 때론 호도하기도 하지만 끝내 양심 때문에 사실을 고백하고 참회한다.

하지만 제니는 그들 앞에 가디언처럼 나서지 않는다. ‘사적 구제(救濟)’라는 할리우드 플롯과 궤를 달리한다. 제니는 경찰이 아니다. 사건을 파헤쳐 응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가해자가 된 이들이 한편으론 자신의 환자이기에, 그녀는 그들의 비밀에 대해 함구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어떠한 이유이던 자신이 도움을 주지 않아 죽은 이에게 이름을 돌려주려는 윤리적 실천을 묵묵히 수행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양심이라는 질서를 강요’하는 가디언이 아닌 ‘양심을 실천’하는 리더(leader)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을 양심의 고통에서 구제한다.

인상적인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제니가 근무하는 병원의 구조다. 대기실보다 진료실이 낮게 배치돼 있다. 제니는 늘 대기실로 나와 직접 환자들을 부축해 진료실로 들어간다. 낮은 곳에 임하는 그녀의 모습은 인상을 넘어 오랜 잔상으로 남아 있다. 이로써 진짜 엘리트란 어떤 모습인지 직시할 수 있게 된다.

평소 모든 파업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소극적으로나마 모든 파업을 지지한다. 그럼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맞물리는 때에 병원의 집단휴진은 재고돼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할 것은 공공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 정부 역시 밀어붙이기보다는 지역의 의료진 확보를 위한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그 누구랄 것도 없다. ‘고통의 시대’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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