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이효성의 절기 에세이] 상강(霜降), 서리가 내리는 때

[이효성의 절기 에세이] 상강(霜降), 서리가 내리는 때

기사승인 2020. 10. 23. 04:0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이효성 아시아투데이 자문위원장,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효성의 절기 에세이
오늘(23일)은 가을의 마지막 절기로서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frost descent)이 시작되는 날이다. 서리는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붙은 것으로, 맑고 바람이 없는 날 밤의 기온이 빙점 이하로 떨어질 때 생긴다. 그런데 이 시기는 낮에는 맑고 상쾌한 날씨가 계속되나 일교차가 커서 밤에는 기운이 뚝 떨어져 빙점 이하가 되면서 풀잎이나 낙엽이나 나뭇가지 등에 서리가 맺히는 것이다. 이것이 늦가을에 처음 오는 묽은 서리라고 해서 무서리로 불린다.

중부 지방에서 서리는 대체로 시월 중순 어간부터 이듬해 4월 중순까지 약 6개월 정도 내린다. 그런데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기온이 빙점 이하로 되어 식물 세포 안에 있는 물이 얼어 세포가 파괴되고 식물이 죽게 됨을 뜻한다. 따라서 서리는 농작물 특히 여름작물들에게는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농사에는 매우 경계하고 피해야 할 대상이다. 벼를 비롯한 농작물은 어떤 경우에도 서리가 내리기 전에는 수확을 마치도록 해야 한다.

상강 어간은 마늘을 심고 양파 모종을 이식하는 적기이기도 하다. 또 마의 덩이뿌리를 이 무렵부터 대설까지 수확한다. 또 아직껏 하지 못한 경우, 조와 수수를 수확하고, 고구마를 캐고, 콩을 타작하고, 호박, 밤, 감을 따고, 서리 맞기 전에 고추와 깻잎도 따야 하는 등으로 무척 바쁜 때다. 과거 이모작 시절에는 이 시기에 벼를 베어 타작하고, 벼를 베어낸 논에는 다시 가을보리를 파종한다. 그래서 ‘한로 상강에 겉보리 간다’, ‘보리는 입동 전에 묻어라’, ‘입동 전 가위보리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절기 에세이 상강 사진 1
서리가 내리는 상강 무렵에는 만산홍엽이 노을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상강을 하루 앞둔 22일 산기슭이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 이효성 자문위원장
과거에는 상강 어간도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신적·시간적 여유와 함께 수확에 의한 물질적 여유까지 생기게 되어 바쁜 와중에도 같이 일을 했던 이웃들과 심지어는 길손까지 청해서 나누며 즐기고 농우도 푸짐히 먹였다. 그래서 ‘농가월령가’ 9월령의 다음 구절은 한로와 상강 절기에 적절해 보인다. ‘한가을 흔한 적에 과객도 청하나니 / 한 동네 이웃하여 한 들에 농사하니 / 수고도 나눠하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 이때를 만났으니 즐기기도 같이 하세 / 아무리 다사하나 농우(農牛)를 보살펴라 / 핏대에 살을 찌워 제 공을 갚을지라.’ 우리 조상들의 마음 씀씀이가 이러했다.

상강 무렵은 한반도에서 최고의 단풍철이다. 한로 전후로 북녘의 산정에서부터 시작한 나뭇잎들의 아름다운 오색단장이 이 무렵에는 산 아래까지 내려오고 점점 남하하여 상강 절기 중에 남부지방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말 그대로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울긋불긋한 단풍 천지가 된다. ‘농가월령가’ 는 이 무렵의 모습을 ‘만산풍엽은 연지로 물들이고’라고 묘사하고 있다. 상강 절기의 단풍의 화려함을 두고 만당(晩唐)의 시인 두목(杜牧)은 ‘서리 맞은 나뭇잎이 이월(양력 3월)의 꽃보다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라고 읊었다.

우리 속담의 ‘서리를 기다리는 늦가을 초목’이라는 말처럼, 이때부터 겨울 맞을 준비를 위해 나무들은 서리 맞아 시든 잎사귀들을 땅에 떨구고, 동면(冬眠)하는 벌레들은 모두 땅 속으로 숨는다. 이 무렵에 대부분의 초목의 잎은 변색하여 화려함을 뽐내기도 하지만 이내 시들어져 버린다. 그래서 당장 보기에는 좋아도 얼마 가지 않아 흉하게 됨을 이르는 ‘구시월의 세단풍(細丹楓)’이라는 속담이 생겼으리라.

나뭇잎은 이제 조락하여 낙엽으로 땅에 쌓이거나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면서 사람들을 우수에 젖게 한다. 바람에 우수수 지거나 이리저리 날리다 사라지는 낙엽에서 사람들은 고독, 이별, 상실, 소멸, 죽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낙엽 또는 고엽이야말로 가장 가을다운 물상이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낙엽들이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이별과 상실을 노래하는 냇 킹 콜(Nat King Cole)의 ‘고엽(枯葉)’,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라는 가사가 있는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 등의 노래가 심금을 울린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