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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내일은 ‘우리의’ 내일의 태양이 떠야 한다

[칼럼]내일은 ‘우리의’ 내일의 태양이 떠야 한다

기사승인 2020. 11. 1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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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오래된 농담 하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세 자로 줄이면? 줄임말로 ‘바함사’ 정도가 짐작되겠지만 정답은 ‘바람뿅’이다. 쉽고 훨씬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뿅’은 부사로서 갑자기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모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전자의 말 줄임이 이성적인 분석이라면 후자는 감각적이다. 의성과 의태의 중간쯤 되는 이 표현엔 의외성과 더불어 당혹감이 묻어난다.

마거릿 미첼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의 시대적 배경은 남북전쟁 직전에 시작해 전후 재건에 이르기까지다. 영화는 줄곧 미남부의 조지아 주, 타라농장을 소유한 대부호 제럴드 오하라의 16살 딸 스칼렛의 시점을 쫓아간다. 이야기의 시작은 화려한 남부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와 귀족적 취향의 묘사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곧 전쟁이 발발하고, 그 절대적 참혹함과 충돌돼 등장인물들의 삶은 더욱 비극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주인공 스칼렛이 농장을 재건하는 과정 역시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사실 이 작품의 위대함은 욕망에 대한 절절한 서사에 있다. 요즘말로 비호감형인 주인공 스칼렛과 레트는 호감형 캐릭터인 멜라니와 애슐리를 뒤로 하고 전면에 나선다. 일반적인 장르영화에서 보이는 등장인물의 배치와 역행한다. 물론 미첼의 원작이 설정하고 있는 뛰어난 착상에 기인하지만, 할리우드영화가 대중이 선호하는 선한 이미지의 주인공캐릭터보다 욕망의 화신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당시엔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출은 이후 여러 영화에 반영된다. 주인공들을 스크린의 전경에서 빼고 배경에 배치하는 형식의 전복을 시도해 영화사에 높은 평가를 받은 ‘우리 생애 최고의 해’ 같은 영화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으로서 남북전쟁은, 노예 신분 흑인들의 해방을 주장한 링컨이 이끈 북부의 공화당정부와 대농장이 포진한 남부연합이 치른 미국의 어두운 역사다. 이는 연방유지냐 독립이냐를 두고 일대 격전을 벌인 미국인들의 의식에 연방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게 된 ‘모멘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남부의 지주들이 노예제도를 유지해야할 이유만큼, 공업지대인 북부의 자본 역시 흑인노동과 같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는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충돌했다는 것이 역사적 평가다.

사실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미국인들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실용주의)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억척스럽기까지 한 스칼렛의 변화를 쫓아가다보면 과거의 향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어쩌면 인종주의적 한계를 보인 원작소설에서조차 전쟁이전 남부의 영광으로 복귀를 도모하기보다 더욱 견고해진 연방제로 묶인 미국의 질서를 수용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야기 내내 스칼렛은 애슐리를 짝사랑하지만, 그녀는 끝내 자신이 사랑하게 되는 이가 레트임을 깨닫게 된다. 애슐리로 상징되는 남부의 정서를 동경한 스칼렛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질서에 걸맞은 인물인 레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내 알바 아니다”(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며 자신을 떠난 레트를 그녀는 끝까지 단념하지 않는다.

지난 3일엔 미국대선이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그 결과가 불투명하다. 이미 미국 언론은 바이든의 손을 들어준 것 같은데, 트럼트는 불복을 선언하고 끝내 대법원 판결로 가려는 모양새다. 어쩌면 내란수준의 소요가 발생하지나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호사가들은 US(United States)의 견고한 믿음이 흔들리는 조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장 ‘바람뿅’처럼 연방이 해체되진 않을 것 같다. 그러기엔 미국은 너무도 강력한 군산복합체의 카르텔로 이뤄진 고도의 군사력에 의지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스칼렛의 마지막 명대사,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 될 것”(Tomorrow is another day)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또다시 그들 나름의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을까 싶다. 미국의 주류세력이 그렇게 쉬이 연방을 단념할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말이다. 그녀의 다짐은 미국에게만 적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에게도, 미국을 기점으로 변화된 국제정세에 걸맞게 우리의 태양을 떠오르게 할 필요가 있다. 미첼의 문장을 더 멋지게 의역한 솜씨처럼, 우리도 우리식의 실용주의 노선으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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