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이효성의 절기에세이] 곡우(穀雨), 곡식을 위한 비

[이효성의 절기에세이] 곡우(穀雨), 곡식을 위한 비

기사승인 2021. 04. 20. 00:0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아시아투데이 주필
이효성의 절기 에세이
오늘은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grain rain)가 시작되는 날이다. 곡우는 곡식 작물에 필요한 비가 내린다는 절기다. 그런데 봄은 대체로 건조한 경우가 많아서 곡우 무렵에 내리는 단비로 가뭄을 해갈하고 그 물로 못자리를 하였기에 관개시설이 없거나 부족했던 과거에 곡우는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였다. 곡우 때의 비가 농사, 특히 벼농사에 꼭 필요하였기에 농촌에서는 ‘곡우에 비가 안 오면 논이 석자가 갈라진다’고 걱정했다. 이 무렵의 절기를 곡우라는 이름을 붙인 데에는 이 어간에 농사에 필요한 비가 꼭 내리기를 바라는 농경사회의 소망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곡우 어간의 가장 큰 자연의 변화는 역시 지상의 녹화(綠化)다. 이 무렵 풀잎들은 땅 위를, 그리고 나뭇잎들은 나무를 덮어간다. 특히 나뭇잎들은 대체로 청명 어간부터 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여리고 청순한 어린잎으로 노란빛이 감도는 연둣빛이다. 이들 연둣빛 어린잎들이 조금씩 돋아나는 모습은 꽃이 피는 모습만큼이나 신비롭고 경이롭다. 이 여린 연둣빛 어린잎들이 햇빛을 받고 조금씩 자라 곡우 무렵에 이르면 더 커져 제대로 된 잎의 형태를 갖추면서 부드러운 연녹색으로 바뀌었다가 햇빛을 더 받으면서 이내 연초록으로 바뀐다. 그렇게 해서 곡우 어간은 청순한 연초록 잎들이 펼치는 신선한 신록의 계절이 전개된다.

이때에 비가 제대로 오게 되면 땅에서는 풀잎이, 그리고 나무에서는 나뭇잎이 부쩍 자라면서 그야말로 싱그러운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한다. 정지상의 저 유명한 한시 〈송인(送人)〉의 한 구절처럼 ‘비 그친 긴 강둑에 풀빛이 더욱 푸르다(雨歇長提草色多)’. 이처럼 곡우 어간에 대지와 나무들이 온통 풋풋한 새잎으로 뒤덮이면서 지상은 싱그러운 연초록으로 단장하게 된다. 나무와 땅에 자라는 이 소생의 여린 새잎들로 곡우절기는 아마 연중 그 어느 때보다 신선한 느낌을 주는 때일 것이다. 바야흐로 세상은 급격히 청순한 연초록의 천하가 된다. 적어도 5월 하순 무렵까지는 누가 뭐래도 연중 가장 신선하고 풋풋한 연초록의 세상이다.

곡우 절기 에세이 사진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를 앞둔 19일 서울 강서구 구암공원의 나무들이 싱그러운 연초록으로 새단장하고 있다. / 이효성 주필
이 어린 나뭇잎들을 키우기 위해 나무는 뿌리에서 수분을 흡수하여 가지로 보내야 한다. 곡우 어간에 나무에 수액이 많이 오르는 이유다. 그래서 이 무렵에 사람들은 산에 가서 주로 자작나무, 박달나무, 다래나무 등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채취하여 몸에 좋다고 약수로 마신다. 속설로는 경칩 어간의 고로쇠나무 수액은 남자에게 좋고, 곡우 어간의 자작나무 수액은 여자에게 좋다고 하나 수액을 채취한다고 나무를 학대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차나무는 상록수지만 다른 나무들처럼 청명 어간부터 새잎이 나며 곡우 전이나 어간에 채취한 두 잎의 새순으로 만든 차를 우전(雨前)이라고 부르는데 우전은 녹차 가운데 최상품으로 친다. 녹차는 홍차, 보이차, 우롱차 등과는 달리 차나무의 잎을 따서 발효시키지 않고 바로 가열한 다음 건조시켜 만든 차로 섭씨 60도 정도의 물에 우려 마시는데 차 잎 본래의 향이 강하고 마신 후에 혀끝에 감도는 은은한 단맛이 특징이다. 우전처럼 한두 개 삐죽 나온 연두색의 어린 찻잎으로 만든 차를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작설차(雀舌茶)라고 부르는데 그 원료인 차나무 어린잎의 모양과 빛깔이 참새 혀와 같기 때문이다.

뿌리혹박테리아로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주기에 논이나 밭에 많이 심는 콩과 식물 자운영이 곡우 무렵부터 나비 모양의 붉은색 꽃을 둥글게 모여 피운다. 꽃향기가 좋아 관상수로 많이 심는 수수꽃다리의 꽃들이 피어 짙은 향기를 풍기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나무는 본래 이 땅의 것이었고 멋진 우리 이름이 있음에도 라일락이라는 서양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무렵에 조팝나무는 양지 바른 산야에서 튀긴 좁쌀 같은 새하얀 꽃들을 가지에 다닥다닥 붙인 듯한 특이한 모습으로 피워낸다. 이 무렵부터 6월까지 우리의 강토를 붉은 꽃동산으로 만들어 놓는 철쭉꽃들도 피어난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