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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설득과 토론 그리고 배틀과 정치

[칼럼]설득과 토론 그리고 배틀과 정치

기사승인 2021. 07. 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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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대학의 수업에서 다루는 텍스트 해제라는 것이 해석과 비평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딱히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강의라는 형식상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종종 단정적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다. 때론 학생들의 이해를 끌어내기 위해 이미지를 듬뿍 담은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을 활용한 설득전략을 구사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런데 문제는 설득(persuade)이라는 것의 요체가 ‘은근한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데 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많은 과목에서 차용되는 교수법의 기초엔 설득의 심리학이 자리 잡고 있다. 설득은 고대로부터 수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인류문명과 함께해 왔다. 그만큼 경쟁적인 인류사회에서 타인의 공감과 동의를 구하는 일은 나를 유리한 고점에 위치시키는 중요한 포석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설득을 규정해 본다면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것은 지피지기의 전략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손자의 논리가 숨어있다. 말하자면 설득은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에게 맞게 대처하는 일이다. 나아가 대상 세계의 니즈(needs)를 간파하고 그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위와 같은 과정은 궁극적으로 완벽한 통제를 통해 대상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감정을 유발함으로써 수요를 만들어 낸다. 수요는 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한시적으로나마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소비사회 기준이 된다. 그렇게 설득을 통해 창출된 수요는 현대 인류에게 소비 주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욕망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설득은 고도의 마케팅전략과 궤를 같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의 초반 수강생으로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더 알고 싶다는 흥미와 욕망을 자극하고 수업내용에 대한 확신과 기억을 유지하게 한다. 마침내 그 논증적 결론이 수강생 스스로가 품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됐음을 확인하게 되면, 그것을 꽤 괜찮은 수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사유와 가치관을 조정하는 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제도권 교육의 한계라고 치부하기엔 떨떠름하다. 성찰을 넘어 늘 갈증을 느끼는 지점이다.

그래서 매주 진행하는 세미나에서 몇 가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가능한 한 교수자인 필자가 세미나에서 다룰 영화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세미나가 수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과 진짜 토론을 하고자 시도한다. 때문에 영화 선택권도 학생들에게 주어진다. 학생들의 의견을 헛소리라고 일갈하지 않고 왜 그런 사유에 도달했는지 그 생각의 근원을 찾으려고 함께 노력해 보고자 노력한다. 자발적 무장해제를 통해 소통과 진정한 토론을 맛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게 만만치 않은 일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예의 설득을 하고 있고 공감과 동의를 강조(?)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흠칫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뒤로 물러서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발뺌한다. 이미 학생들의 눈에 교수자라는 위치에 대한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그만큼 소통을 전제로 한 토론은 어렵다.

정치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각종 토론과 경선이 진행 중이다. 어떤 정당에서 주최하는 ‘토론 배틀’이라는 제목의 행사도 눈에 띈다. 그런데 토론이 논쟁적일 수는 있지만, 전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싶다. 문득 설득과 토론이 그 정도를 벗어나 배틀(Battle)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적인 정치란 결국 토론을 통한 합의의 과정인데 말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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