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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서거] 뗄레야 뗄 수 없는 애증의 60년 전두환

[노태우 서거] 뗄레야 뗄 수 없는 애증의 60년 전두환

기사승인 2021. 10. 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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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 고교 졸업후 나란히 육사 11기 진학
늘 따라가는 모양새였지만 세상은 먼저 등져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1987년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26일 서거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절친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두 사람은 1952년 육사에 나란히 입학한 이후 60여 년에 걸쳐 애증의 인연을 이어왔다. 늘 노 전 대통령이 자신보다 한 살 위인 전 전 대통령의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였지만 세상을 떠나는 데는 한발 앞섰다.

두 사람의 인연은 대구에서 시작된다. 대구가 고향인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업중을 거쳐 1951년 경북고를 졸업했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대구에 정착한 전 전 대통령은 같은 해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두 사람은 이듬해 나란히 육사에 진학한다. 이후 두 사람은 돈독한 동기생이 됐고, 1955년 2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같이 임관한다.

노 전 대통령은 미국에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육사 11기가 주축이던 군내 사조직 ‘하나회’에 가입한다. 이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대 정보장교, 방첩부 방첩과장, 육군본부 정보과장, 방첩과장을 거쳐 수도사단 대대장, 보병 연대장, 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당시 9사단장이던 노 전 대통령은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9사단 병력을 중앙청으로 출동시켜 쿠테타 성공에 기여한 노 전 대통령은 다음날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됐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뒤 그 해 8월 전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자 국군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1981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입당한 노 전 대통령은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는 등 전두환 정권의 ‘2인자’로 자리잡았다.

1987년에는 전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으며, 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6·29 선언을 거쳐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의 관계는 돈독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 ‘5공 청산’이라는 거센 바람이 불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틈이 벌어졌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요구가 빗발치자 노 전 대통령은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한 곳에 가 있으라고 권고했고, 전 전 대통령 측은 백담사를 택했다.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노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비자금 사건 등으로 나란히 구속됐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은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다’ ‘친구나 동기에게 후임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등의 발언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1997년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받은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당시 임기 말이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오랜 투병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은 아들을 통해 5·18 무력 진압에 대해 사과했지만, 전 전 대통령은 5·18과 관련해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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