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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토론의 시간

[칼럼]토론의 시간

기사승인 2022. 01. 2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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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몇 해 전,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이다. 찬반이 나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두 명의 패널이 나와 논쟁 중이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두 사람은 호기롭게 치열한 토론을 벌이는가 싶었는데, 이내 분위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승기를 잡은 쪽 평론가의 발언이 정도를 벗어났다. 상대 패널은 불쾌한 티를 냈고 스튜디오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이때 재치 있는 사회자의 과장된 웃음소리로 방송은 유쾌한 척(?) 마무리됐다.

그 평론가의 발언 요지는 이랬다. ‘내가 반대 입장에서 변론하면 잘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못하는 게 아쉽다.’ 요컨대 상대 패널에 빙의해 자신의 주장과 정반대의 관점에서 논쟁에 참여했어도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의미였는데, 젊고 패기 넘치는 그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충분했다. 그런데 일개 시청자로서 느낀 인상은 ‘궤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실 궤변론자의 출현은 고대 그리스에 있었던 전제 정권의 붕괴와 관련이 있다. 고대 폴리스의 시민들은 권력으로부터 빼앗겼던 재산권을 되찾기 위해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은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고 변론하기 위해 논리학을 배우고 웅변술로 무장한다. 말하자면 이때 교습소의 일타강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문제는 시민들이 권한을 되찾는 과정에서 일종의 지식 브로커가 개입된 데 있다. 브로커의 목적에 부합되는 가치는 정의구현보다는 이익 창출에 집중된다. 단지 어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에 상당한 대가를 받아내는 데 있다. 당연히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이들이 승소율 높은 대리인을 선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재산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이들보다는, 독재체제에서 적당히 타협해 일정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그들 지식 엘리트들은 고대로부터 경제력을 토대로 한 이들과 함께 이익집단을 형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뭔가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상황과 매치되는 점이 있다.

다시 그 젊은 평론가의 이야기로 돌아와, 그가 한 행동의 단면은 엘리트이즘의 문제점을 액면 그대로 드러낸 일종의 사건이다. 능력주의로 무장한 엘리트이즘은 다수가 겪는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신통한 묘책이 있다. 교육이 신앙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지는 한국사회에서 학벌을 매개로 정치, 경제, 관료 및 언론 사회 곳곳에 포진한 기득권 카르텔은 차별과 분열이라는 씨실과 날실을 촘촘하게 짜놓고 종과 횡으로 국민 사이에 분노와 갈등을 유발시킨다.

그와 같은 분노와 갈등의 그물망을 꿰는 ‘비뚤어진 바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지식 엘리트 그룹이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이해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 입장이 바뀌어도 상관이 없다. 자기변명에 불과한 언어를 구사하며, 그저 병렬로 이으면 말이 된다고 자기 최면에 빠진다. 데이터가 없는 논리는 허접하고 철학은 곤궁하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말을 오염시킴으로써 정치 혐오증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늦었지만 토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흔히 토론(討論)을 ‘말로 하는 싸움’이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논리로 치다’는 뜻이다. 토론의 영어단어인 ‘Discussion’의 어원 역시 ‘cuss’는 ‘cut’에서 유래된 단어로 상대를 ‘자르는’ 파괴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러나 토론은 상대를 칼로 내려치는 행위가 아니다. 죽자고 덤비는 개싸움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품격 있는 예리한 언어로 베듯이 상호 간에 ‘틈’을 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상대 혹은 자신의 논리에 난 상처로서 틈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벌려놓은 틈엔 우리 사회의 모순이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다. 성찰적인 자세로 그 상처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는 근본적인 철학을 가진 이가 누구인지 가늠할 시간이다. 특정 집단의, 특정 집단에 의한, 특정 집단을 위한 논리가 아닌, 불평등을 겪고 있는 대다수 소시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정책을 펼칠 이가 과연 누구인지 가늠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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