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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공기, 살인

[칼럼]공기, 살인

기사승인 2022. 04. 2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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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따져보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위 ‘디제시스’(diegesis)라는 허구적 공간의 범위는 그리 크지 않다. 영화 속 운명적 만남은 우연을 가장하기엔 확률적으로 허상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이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영화는 픽션, 다시 말해서 허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영화적으로 재단된 단면에 우리의 욕망을 투사한 채, 서사의 중심이 되는 특정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다가도 때론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러다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면 대부분 숨 쉬는 첫 호흡은 맑기 마련이다. 경우에 따라선 숨 막히는 우울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영화를 보는 행위의 궁극 정서는 정화(淨化)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허구 속, 영화적 리얼리즘의 공간이 현실의 공간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 22일 개봉된 영화 ‘공기살인’이 바로 그런 영화이다. 영화는 우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매우 영화적으로 다룬다.

2011년, 뒤늦게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법정투쟁을 벌인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2020년에 가서야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를 통해서 그 피해 규모가 밝혀진다. 이 사건은 67만 명의 건강 피해경험자와 1.4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사회적 대참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대자본 권력과 그와 연계된 법조 카르텔 그리고 의료계 및 학계에 걸친 사회 전반의 비리가 낱낱이 밝혀지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초 피해 발생 시점에서부터 따져 보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족히 27년이 걸렸다는 점은 그간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다.

어쨌든 막 개봉된 작품에 대해 스포일러를 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소개하자면, ‘공기살인’은 영화적으로 매우 흥미진진하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영화는 특정 관객층으로 하여금 그 내용이 팩트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크레디트가 오르면 유난히도 일어나지 않는 관객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삼키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허구라는 환영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었음을 직시하고 잠시 말문을 잃게 된다.

사실 영화의 모양새는, 오랜 기간에 걸친 법정 공방의 실증자료와 피해자들의 인터뷰 자료 등, 철저한 고증을 기초로 해서 영화적으로 재구성됐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다큐멘터리 요소가 가미됐다거나 하진 않는다. 영화는 철저하게 영화적 작법을 따른다. 그런데 이 점이야말로 결과적으로 영화를 견인하는 힘이 되며 현실을 고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영화는 법정 공방을 준비하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시간순으로 쫓아가지만, 극적 전환점들을 통해 영화적 환영에 빠지게 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현실 고발이라는 점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공기살인’은 리얼리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장치로, 영화에서는 구체적인 직업군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바로 의사. 검사 출신 변호사 그리고 해당 기업의 임원이다.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가해자와 동조했던 집단을 대변하면서도 동시에 가습기 살균제로 사망한 피해자의 가족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신뢰를 깨는 자들 역시 피해당사자 혹은 그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짐짓 말하고 있다. 영화제목이기도 ‘공기살인’을 빗대어 얘기해 보면, 집단이기주의 혹은 이권에 눈이 먼 이들로 하여금, 그들로 인해 신뢰가 깨진 사회는 마치 오염된 공기와도 같이 누구누구를 가리지 않고 가해자까지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을 바라보게 한다. 공기살인은 탁월하게도 우리 사회의 신뢰를 깬 이들에게 그 비수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바로 그 지점을 경고하고 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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