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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영화 ‘브로커’, 이 시대 자화상 전복의 시도

[칼럼]영화 ‘브로커’, 이 시대 자화상 전복의 시도

기사승인 2022. 06. 1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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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칸에서 전해진 기쁜 소식과 함께 영화 ‘브로커’가 국내 개봉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냉철한 비판의식은 여전히 차분한 듯 곤두서 있으며, 연출에 대한 열정은 언어가 다른 우리나라 배우들과 고스란히 공유돼 있다.

사실 브로커는 일반적인 문법과는 괴리가 있는 작품이다. 일단 브로커는 가족에 대한 영화다. 그중에서도 대안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대안 가족에 관한 주제가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로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연대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감독의 전작을 살펴봤을 때, 고레에다는 결말을 일부러 애써 화해의 정서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감독의 담담한 시선이 녹아 있다. 가족의 부재로 결핍을 겪는 인물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꾸린 대안 가족을 국가나 사회는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연장선상에서 브로커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로드무비 장르가 추구하는 인물의 변화 혹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선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로드무비는 궁극적으로 등장인물 간의 변화를 통한 연대에 포커스가 맞춰지기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형식을 비트는 영화가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은 간과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유독 브로커의 엔딩은 변화가 적다.

한편 브로커는 형사가 등장하는 추적물이다. 그러나 쫓고 쫓기는 긴장감과는 거리가 있다. 논리적 추리나 반전의 긴박감도 부재하다. 이를 대신해 채워진 정서는 관찰과 성찰이다. 감독은 관음의 주체를 남성이 아닌 두 명의 여성 형사로 대체한다. 그리고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추리보다는 성찰로 메꿔져 있다. 어쨌든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감독은 기존 영화의 형식과 관습을 전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비판적인 평론들이 많다는 것을 매체를 통해서 접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에 동의하기에는 비평의 관점이 너무 피상적이다. 아기를 유기하고 매매하는 인물들을 미화했다거나 하는 글들은 일견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인물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은유하는 바가 무엇인지 사유해 본다면, 이 영화는 분명 매력적인 작품이다. 철없는 보육원 출신 아이 해진, 역시 같은 보육원 출신인 동수(강동원 분), 그리고 뚜렷한 출생 배경과 행적이 묘연한 상현은 모두 하나의 캐릭터로 귀결된다.

상현의 마지막 행적은 모호하지만, 아기 우진의 제자리(?)를 다시 세우기 위해 살인을 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잠적한 채, 마치 자신의 신분을 세탁이라도 한 것처럼 세탁소를 운영하며 숨어 산다. 영화는 그가 우진이와 다른 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데, 그는 아이의 미래에서 온 구원자이자 관찰자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진의 미래는 곧 상현이 맞이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언뜻 영화는 따듯한 듯 보이지만 사실 냉철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고레에다는 판타지가 아닌 우화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묘사한다. 브로커는 가부장제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방치한 이 시대의 자화상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하나의 거대한 가족국가인 일본의 자화상이 곧 우리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답습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인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 우리나라가 국부나 혹은 국모를 모시는 가부장제 사회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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