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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9> 불멸의 세레나데 ‘애수의 소야곡’

[대중가요의 아리랑] <9> 불멸의 세레나데 ‘애수의 소야곡’

기사승인 2022. 09. 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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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실연과 망국의 체념적 탄식에 젖어있던 겨레의 애수(哀愁). '애수의 소야곡'은 가수 남인수의 출세작이자 마지막 가는 길을 위로한 장송곡이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최창수는 어머니의 개가(改嫁)로 강문수가 되었다. 가난과 설움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소년 노동자가 되었다. 음악적인 끼를 버리지 못한 그는 서울로 돌아와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 '눈물의 해협'을 취입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문인 이부풍(본명 박노홍)에게 부탁해 노랫말을 고쳤다. 불멸의 세레나데 '애수의 소야곡'은 그렇게 탄생했다.

가사만 바꿨는데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가사의 중요성을 새삼 입증한 것이다. 가수의 이름도 남인수로 바꿨다. 남인수는 일약 최고의 인기가수로 인생의 반전을 이루었다. 남인수와 박시춘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한국 가요사의 서막(序幕)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당시 언론도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美聲) 가수의 탄생'이라며 '가요 황제'의 출현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애수의 소야곡'은 1937년에 발표한 트로트 곡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에 이르기까지 숱한 히트곡을 낸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첫 성공작이다. 음반을 낸 오케레코드사도 이 곡을 계기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애수의 소야곡'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노래했다. 떠난 임을 애타게 그리는 체념적 우수가 짙게 깔려있다. 그 서정적인 가사와 애절한 가락이 남인수의 목소리를 만나 절창을 이루어낸 것이다.

당시는 '사랑'이란 말을 드러낼 수도, 품은 연정을 고백할 수도 없어 가슴앓이만 하던 1930년대였다. '애수의 소야곡'은 그렇게 사랑을 잃은 청춘남녀의 마음을 대변하며 커다란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나아가 이 노래는 옛 가사문학이나 전래 민요가 지닌 임의 부재(不在)에 따른 보편적 정서를 계승하고 있다. 운다고 옛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과 청춘도 덧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임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눈물은 드러난 통곡이 아니라 고독한 속울음이다. 떠난 임을 그려온 오랜 이별의 정한을 대중가요가 품은 것이다. 노랫말 중에 '휘파람 소리'와 '애타는 숨결' 등 애잔한 별리의 정조를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문학성까지 갖췄다. 명곡의 생명력은 이런 것이다. '애수의 소야곡'이란 노래는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쉽게 사위지 않은 것이다.

통기타와 청바지의 청년문화가 유행하던 1970년대, 어둠살이 내리는 대학 캠퍼스 벤치에 앉아 한 번쯤은 연주해 보았을 '애수의 소야곡' 기타 전주곡. 흐느끼듯 스며들던 박시춘의 그 절묘한 가락이야말로 기타로 대중음악을 배우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였다. 남인수의 노래는 소야곡(小夜曲)이 많다. 소야곡(세레나데)은 고적한 저물녘 사랑하는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거나 연주하던 음악을 말한다.

남인수는 1955년 '추억의 소야곡'을 부르며 아내와 헤어지고 '목포의 눈물' 가수 이난영의 품으로 돌아갔다. 1935년 목포가요제에서 처음 만난 이난영는 남인수의 첫사랑이었다. '소야곡'을 부르며 가수가 되었고 '소야곡'을 들으며 4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남인수. 그의 청아하고 애잔한 '소야곡'의 선율은 80년이 지난 오늘밤도 슬퍼서 아름다운 한줄기 바람이 되어 연인의 창가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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