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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0> 이별의 통한 ‘눈물젖은 두만강’

[대중가요의 아리랑] <10> 이별의 통한 ‘눈물젖은 두만강’

기사승인 2022. 09. 1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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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두만강은 겨레의 눈물로 얼룩진 강이다. 두만강은 민족의 통한이 스며있는 강이다.

1990년대 말 가곡 '선구자'의 고향인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정(龍井)의 독립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에 갔다가 백두산과 두만강을 둘러본 적이 있다. 함경도와 만주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유장한 강물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젖은 두만강'을 나직하게 불렀다. 노래는 두만강에 얽힌 숱한 민족사의 애환을 떠올리며 나그네의 깊은 탄식을 자아냈다. 한민족에게 두만강은 한과 울분의 강이었다.

역사의 질곡에 내몰려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옛 사람들의 슬픔과 한탄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가수 김정구가 부른 대중가요 '눈물젖은 두만강'도 그렇게 탄생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어느 가을밤 만주 공연에 나섰던 극단 예원좌 단원들은 두만강 유역 도문(圖們)에서 여정을 풀었다. 국경의 객사에서 맞이하는 밤, 젊은 음악가 이시우도 고적한 상념에 젖어있었다.

더구나 옆방에서 간단없이 흘러나오는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여관 주인을 통해 사연을 알고 보니, 그녀는 독립군으로 출정한 남편의 소식을 수소문하러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과 절망을 가누지 못한 채 밤새 오열한 것이라고 했다. 차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이시우는 두만강 나루터를 찾았다.

겨레의 피눈물이 어린 듯한 강물을 바라보며 문득 쓰라린 가슴속을 훑고 나오는 선율이 있었다. 여관에 들어선 이시우는 여인의 처연한 호곡성에 실렸던 나라 잃은 민족의 한과 설움을 오선지에 담았다. 노랫말 또한 이시우가 지었다고도 하고, 만주의 문학청년 한명천이 썼다고도 한다. 남북한에서 모두 버림받은 공산주의 혁명가 박헌영의 항일투쟁 일화를 소재로 한 곡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는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김용호의 자문을 거쳐 가수 김정구에게 취입을 부탁했다. '눈물젖은 두만강'에는 정든 고향을 등지고 강을 건너야 했던 유랑민의 아픔이 흥건히 배어있다.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정서를 자극한다고, 광복 후에는 월북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까닭 모를 일이었다. '눈물젖은 두만강'은 노래의 사연만큼이나 곡절이 많았다.

1960년대부터 라디오 드라마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테마곡으로 오랜 세월 전파를 타면서 온 국민의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되어버린 것이다. 풍류시인 김삿갓의 4.4조 풍자시와 함께 흘러나오는 '눈물젖은 두만강'의 시그널 음악은 농촌에서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시보(時報)나 다름없었다. 노래는 KBS 가요무대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고, 실향민인 가수 김정구는 가는 곳마다 두만강을 열창했다.

김정구는 그 공로로 1980년 문화훈장까지 받았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오케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눈물젖은 두만강'은 김정구의 가요 인생 65년과 함께 흐르며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두만강은 망국의 수난과 분단의 아픔이 여울져 흐른다. 이제는 '탈북의 강'이 되어버린 물결 속에는 여전히 비애와 탄식이 스며있다. 가버린 세월, 잃어버린 강, 아~그리운 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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