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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약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자이니라!”

[강성학 칼럼] “약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남자이니라!”

기사승인 2022. 11. 1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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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다" (Frailty, thy name is woman). 이것은 세계적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의 드라마 <햄릿>에서 했던 유명한 말이다. 그로부터 약 4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오늘날 우리는 유니섹스(unisex)의 시대, 혹은 성-중립(the gender-society)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 이런 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성이 인간의 권리나 의무 혹은 인간의 지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성-중립사회는 성을 그것이 여자를 남자에게 복종시키기 때문에 자유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능력을 오용하기 때문에 효율성에 대해, 비합리적 방해가 된다고 간주한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1960년대 미국사회를 휩쓴 소위 민권운동의 파생물인 여성해방운동, 즉 페미니즘(Feminism)이 출현한 이후이다. 그 후 페미니즘은 미국의 대서양과 태평양의 국경선을 넘어서, 특히 자유주의적 이념의 국가들에게 꾸준히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대한민국에도 1970년대에 들어와 서서히 확산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아주 강력한 정치적 및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성들과 비슷하거나, 아니, 실제로 여성을 남성들과 똑같이 만드는 방식으로 남성과 평등하길 원한다. 그들은 직장이 가정보다 더 낫다고 결정해 버렸다. 직장은 그들에게 가정보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인정,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점은 직장이 보다 많은 선택을 제공한다. "선택"은 현대 여성의 상투적인 단어이며, 그 단어는 이제 단순히 낙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의 원칙으로서 "선택"에 헌신하는 것은 여성이 남편과 아이들에 매달리는 가정에 비해 직장은 그것을 언제든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의 효과적인 의미는 여자들의 독립, 즉 남편과 어린 자식들로부터 최대한 독립을 의미한다. 완전한 독립은 적어도 가정을 원하는 여자들에게는 분명히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가능한 한 최대한의 독립을 얻기 위해서 여자들은 남자들을 흉내 내고, 남자들의 삶을 살아가며, 가정의 책임을 남자들이 스스로 수용하는 정도로 축소시키길 모색한다.

하나의 대안적 전략은 남자들이 보다 많은 가사 일을 하게 하고 여자들처럼 행동하게 하여 반려자들이 그들의 독립에 평등한 희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합의에서 여자들의 독립은 강요된 역할과는 대조적으로 계약의 개념에 의해서 유지된다. 성-중립사회는 독립적인 남자들과 여자들, 특히 독립적인 여자들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은 가정에서도 남성과 여성이 똑같고 중요한 차이가 없다고 가정한다. 가정에선 아버지의 역할이나 어머니의 역할 같은 말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똑같이 중립적인 용어로 육아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가장 역할이나 책임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보니 남자는 가정에 무책임하게 되고 여성은 아직도 그런 책임을 여전히 남성에게 기대함으로써 발생하는 갈등으로 인해 가정이 빠르게 붕괴되는 추세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전통적 문화에서 남자에게 소중하게 기대되었던 지도자의 덕목으로 "사나이다움" 혹은 "대장부의 기질" 같은 것들은 우리의 언어나 인간관계에서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그 말은 진기하게 되었고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고전적 "남자다운 남성"이라는 "사나이"는 이제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거의 천연기념물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남녀 간 역할의 전도현상은 이제 "여성스러운 남자들"이 넘쳐나게 만들었지만 그런 남성은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남성에겐 정치지도자나 영웅들에게 요구되는, 그래서 전사다운 "대담함(boldness)"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으로는 요란한 압력단체로 행동하면서도 어떤 페미니스트 지도자도 최고의 공직에 입후보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페미니스트 운동권 사이에서 파당적 분열을 어느 정도 감소시켰다. 자유주의자이든 보수주의자이든 모든 여성들은 다음의 영부인(the first lady)이 남자들의 특권을 침해하는 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여성들은 성-중립사회를 남자들을 지배하기보다는 남자들에게 수치심을 갖게 만들었지만 바로 그 성취가 그들에게 지배의 평등성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남성들의 호통치는 방식과는 다르게 간접적 지배에 아주 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들은 겸손하길 거절하는 만큼이나 겸손을 실천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전통을 규탄하는 것만큼이나 전통을 수락함으로써 지배에서 많은 것을 얻고 있다.

셰익스피어보다 약 100년 앞서 마키아벨리는 자기의 영혼보다 더 사랑했다는 자신의 조국 피렌체가 기독교화로 인해 이탈리아 남성들이 선조 로마인들의 사나이다움을 상실하고 모두 여성화됨으로써 패망했다고 진단하고 새 군주에게 헌정한 비망록인 <군주론>(The Prince)에서 새로운 국가의 수립과 안전을 위해 "사나이다움(virutu)"의 덕목을 요구했다. 그것만이 수시로 변하는 행운의 여신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감, 용기, 그리고 리더십을 의미했다. 오늘과 같은 성-중립의 시대, 즉 페미니스트의 사회에서 살다 보니 감동을 주는 "사나이다운" 정치 지도자가 종종 그리워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부질없는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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