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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22>해방정국의 낭만가요 ‘신라의 달밤’

[대중가요의 아리랑] <22>해방정국의 낭만가요 ‘신라의 달밤’

기사승인 2022. 12. 2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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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맛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신라의 달밤'은 해방정국의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피어난 낭만가요였다.

해방정국은 이념대립과 남북분단 그리고 동족상잔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독립정부의 최우선 과제인 식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일부 음악가들이 차라리 월북을 선택했지만, 친일 행적의 가요인들은 트로트 음악과 함께 남한 사회에 연착륙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 음악가와 스타 가수들은 변함없는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인기를 누렸다.

혼란하고 팍팍한 대중의 일상을 위로해 준 것은 정치적인 담론에 경도된 좌우진영의 투쟁가나 혁명가가 아닌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 유행가였기 때문이다. 광복 후 대중의 감수성에 부응한 첫 히트곡은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귀국선'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달밤'이라는 걸작이 등장하며 흔들림 없는 트로트의 위력을 과시했다. '신라의 달밤' 하면 가수 현인과 그의 독특한 발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현인(본명 현동주)은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했고, 징병을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극단 활동을 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처음에는 대중가요를 거부하다가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취입한 데뷔곡이 '신라의 달밤'이었다. 이 노래는 전주곡의 멜로디가 매우 이국적이다. 아라비아의 선율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아~' 하는 영탄조의 가사와 함께 본류인 트로트 가락이 전개된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이 같은 노래의 구조를 "일본의 영향을 받은 식민지 시대의 지배적 음악 패턴과 미군정기의 서구적 사조가 하나의 몸 안에 혼성모방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다 기존의 트로트 가수에게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바이브레이션이 노래를 더욱 낯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소 과격하고 분절적인 발성도 오히려 이국적인 성향을 지니며 서구적인 세련미를 갖춘 새로운 울림을 전했다.

'신라의 달밤' 원곡은 일제강점기 말 악극단의 무대공연에서 이국 풍경을 표현하던 춤과 노래였다는 얘기도 있다. 작사가 조명암이 월북하면서 '신라의 달밤'이라는 제목과 노랫말로 대신했다는 주장도 있다. 나아가 '신라의 달밤'이 공전의 히트를 거듭하며 '경주'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되었지만, '천년고도 경주'를 상징하는 노래로서 품격과 내용을 갖췄는지에 대해 마뜩잖은 시선을 건네는 사람들도 있다.

신라의 달밤에는 불국정토를 지향했던 신라인들의 고차원적인 세계관과 풍류와 원융의 인생관이 흠뻑 배어 있다. 유불선(儒佛仙)이 공존했던 신라의 달밤은 청정과 광명, 유현과 적막의 정서에다 개방과 포용, 도전과 혁신의 정신까지 지니고 있었다. 신라의 달밤은 한국 문화의 원류이다. 그런 측면에서 가요 '신라의 달밤'은 천년고도의 문화를 상징하는 '신라의 달밤'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아무튼 현인의 대명사인 '신라의 달밤'은 시대감성에 부응한 성공작이었다. 해방된 조국과 독립국가 건설에는 식민지 시대의 애수와는 다른 근대적 낭만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곡가 박시춘은 탄력적 음색을 지닌 현인의 새로운 캐릭터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신라의 달밤'은 그렇게 광복 후 분단과 대립, 혼란과 결핍 속에서 해방의 기쁨과 새 나라 건설의 희망을 담은 낭만가요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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