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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안양예고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출신이라면, 연기자나 영화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는 게 막연한 생각이다.
만약 이 두 학교를 졸업해 연예인의 꿈을 포기(?)했다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설계하고, 새로운 꿈을 위해 매진할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서울시내에서 가장 가격이 싼 주유소로 유명한 중랑구 면목동의 ㈜오천만석유를 운영 중인 김홍섭 사장은 연기자의 꿈을 접고 석유유통과 주유소 전문가가 되기위해 연일 매진하고 있다.
김사장은 불과 3~4년 전만 하더라도 주유소를 운영하면서도 연기자의 꿈을 접지 못한 그야말로 ‘끼’ 많은 청년이었다.
김 사장은 “1994년 주유소업에 첫발을 내디딘 후 1996년부터 직접 주유소를 운영하게 됐지만 연예인이란 직업이 눈앞에 아른거려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며 “주유소 운영에 전념하게 된 것은 겨우 2~3년 전부터인가 싶다”고 말할 정도로 연예계에 미련을 버린지 얼마 안된다.
또 철없던 시절, 소위 ‘용감한 학생’이라는 이미지가 박혀있지만, 지금은 주유소와 석유저장탱크를 보유한 경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 1982년 서울 한영고교에 입학한 김 사장은 지금으로 말하면 일명 ‘짱’이나 ‘일진’이라고 불릴 정도로 터프했다.
그랬던 그가 고교 1학년 시절 패싸움이 벌어지면서 좌측귀부분과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김 사장은 “그 사건때문에 3번정도 수술을 했고, 학교가 무서웠어요. 1년 후 편입을 하려는데 무서워서 한영고교를 다시 가지 못하고, 안양예고로 갔죠. 정말 무서웠습니다”라고 털어놨다.
1984년 안양예고 2학년에 편입한 뒤 조용히 지내던 그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이듬해 야간자율학습(야자) 시간에 동창 여고생을 보호해 주려다 인근 고등학교 불량배에게 맞은 것이다.
김사장은 “그 때 야자 하기 전에 밖에 나가서 저녁을 먹는 경우가 있었는데 당시 불량배가 여자 동창한테 치근덕거리더라구요. 그래서 ‘너희들 왜 여학생한테 그러냐’라고 소리 쳤다가 연신 맞았죠(웃음)”라고 말했다.
안양예고 동창생 가운데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친구는 1987년 KAL 858편 보
잉 747기 폭파사건을 재현한 영화 ‘마유미’에서 주인공을 맡은 김서라씨(당시 김현희 역).
“김현희씨 역할을 맡았던 김서라씨가 당시 저희반 부반장을 했죠. 고등학교 땐 동창이었는데 대학 가보니 선배가 돼 있더라구요.”
그는 안양예고 졸업과 함께 연극영화 분야에서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중앙대에 지원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래도 연기자의 꿈을 버릴 수 없어 도전 3수만인 1989년에 당당히(?) 진학했다.
당시 연극영화과였던 학과가 연극학과와 영화학과로 분류됐고, 김 사장은 영화 쪽에 관심이 있어 영화학과로 진학했는데 알고보니 감독하고 스태프를 양성하는 곳이었단다.
김 사장은 “고등학교 졸업이 남들보다 1년 늦은데다 대학도 3수 했으니 정말 미치겠더라”며 “중앙대에 진학은 했는데, 글쎄 그때부터 (연극영화과가) 연극학과와 영화학과로 갈릴 게 뭡니까”라며 아쉬워했다.
고등학교 졸업이 친구들보다 1년 늦고, 대학은 2년이 늦다보니 또래와의 사회생활 차이도 무려 3년이나 났다. 성인의 경우 큰 부담이 없겠지만, 20대 청년으로선 상당한 부담이었단다.
그는“3수해서 대학 가보니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3년 정도 차이가 나더라구요. 그래서 대학때는 졸업만큼은 제 때 하자고 이를 악 물고 했죠. 덕분에 1993년 졸업할 수 있었죠”라고 말했다.
안양예고와 중앙대학교 졸업이라는 훈장만으로 어느정도 통할 줄 알았던 연예계는 너무도 높은 벽이었다. “그때 임권택 감독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에게 오디션을 봤는데 전부 낙방했어요. 솔직히 안양예고와 중대 간판이 어느 정도 통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라구요.
” 당시 임 감독은 김 사장을 가리켜 ‘소도둑 같아가지고…’라며 단번에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졸업과 함께 KBS와 MBC에서 오디션을 보고, 연극은 물론 성인영화까지 기웃거릴 정도로 연기자의 매력에 사로잡혀 살았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끝내 연기자로 표출되지 못했다. 김 사장은 “당시 공채인 곳은 KBS와 MBC였는데 모두 2차 오디션까지 붙었어요. 이상하게 3차만 가면 떨어지데요”라고 당시 심정을 얘기했다.
연극이라도 한 번 해볼 심정으로 지망생들과 함께 드럼통에 라면을 끓여먹으며 10개월간 동거동락해 연기력을 키웠다. 덕분에 연극 주연자리가 나왔는데, 도저히 연기가 안 돼 도망쳤다고 한다.
또 성인 에로배우를 해 보라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내가 미쳤냐. 옷 벗는 연기는 안한다”라며 거절했다고 김 사장은 전했다.
결국 김 사장은 대학 4학년부터 1994년까지 3년간 연기공부를 하고, 오디션도 보고 했지만 그가 갈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미련은 미련대로 남아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김 사장은 “한 2~3년 자포자기 하고 있었는데 대전에 있는 친구가 주유소에서 일 한 번 해볼 생각 있냐고 말했어요”라며 “그 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려가서 일에만 열중했어요”라고 말했다.
대전에 있는 주유소에서 총무로 일하다가 1년여 만에 부사장 자리에 오른 그는 ‘이것 하면 돈 벌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1996년 상경해 지금의 주유소를 오픈했다.
김 사장은 “주유소를 인수하는데 한 5억원 정도가 필요하더라구요. 돈이라는 돈은 있는대로 끌어모았어요”라고 회상했다.
“장사가 제법 되더라구요. 그래서 먹고는 살겠구나 했는데, 1997년 외환위기가 왔어요.” 외환위기 당시 주유업계에선 당시 외상으로 공급하던 석유값을 계산해 주면 더 싸게 주겠다고 해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줬단다.
김 사장은 “막상 외환위기가 오니까 팔아먹을 기름조차 없더라구요. 그때 많이 울었습니다. 술도 처음 배웠구요”라고 회상했다.
위기를 잘 넘기면서 주유소도 날로 번창해 크기가 170평에 최대 36만ℓ를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고 7개의 주유기에 16개의 노즐을 설치해 운영중이다.
또 경기도 남양주에 140만ℓ 규모의 저장탱크를 설치, 석유도매업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는 장사가 잘 되면 연기에 대한 생각이 사라질 것으로 알았는데, 주유소 사장으로 마음을 다
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2~3년 전이라고 한다.
“솔직히 마음이 잘 안 잡히더라구요. 처음 주유소 할 때 내가 차라리 돈 벌어서 영화 찍는다는 생각했죠. 그러면서도 어릴적 성질이 남아있어 손님하고 싸우기도 많이 했어요.”
김 사장이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는 국제유가가 폭등하면서 마진이 급격히 축소됐던 2007년부터.
김 사장은 “기름값이 올라가니까 자가운전자는 줄고, 그래서 가격을 팍 내리고 많이 팔자는 ‘박리다매’로 전략을 바꿨죠. 그러니 무지하게 바빠지데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실에서 일을 죽어라고 하다보니 연기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더라구요. 아마도 그 때 현실에서 미치도록 일한 게 ‘연기자의 꿈’을 버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요새도 직접 주유를 하며 10여년간 배운 노하우를 직원들에게 전수하는데 여념이 없다. 또 사업에 관심을 갖는 후배들에게 직접 주유소업에 대해 가르치며 사업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주고 있다.
후배 A모씨는 “한때 어두운 과거가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취업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김 선배가 주유업을 권유했다”면서 “일을 할 때는 엄격한 선배의 모습이 후배를 사랑하는 모습이란 것을 알기에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고 김 사장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 사장은 그의 꿈에 대해 묻자 “저장탱크와 주유소를 같이 갖고 있으니, 앞으로는 주유소 2호점은 물론 3, 4호점 등으로 넓혀 석유유통에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할 때 잔영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꿈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현재의 일에 집중하다보면 과거의 잔영은 사라지게 됩니다. 만약 제2의 꿈이 있다면 거기에 매진하십시오. 그러면 버릴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들이 차차 정리가 됩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