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국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티베트 사태의 여진이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에서 후폭풍을 우려한 탓이다. 중국 당국이 이례적으로 관영 CCTV를 통해 시위로 인한 사상자 발표와 전말을 '빠르게' 알리고 나선 것도 후폭풍을 차단하고 사태의 확산을 막기위한 조치로 보인다.
중국 당국은 140명이 숨지고 828명이 부상한 이번 유혈 사태를 우발적인 시위가 아닌 분리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치밀하게 계획한 분리 독립 시도로 간주하고 있으며 조기 진압에 나선 것도 이러한 정세판단과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위구르족의 독립 움직임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주류인 한족과 다른 아랍인 외모를 하고 있는 위구르족은 종교, 문화, 언어 등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중국인과 이질적이며 1759년 청나라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래 42차례에 걸쳐 독립 운동을 벌였고 1865년에는 봉기로 잠시 독립을 이루기도 했다.
국공내전의 틈을 타 1933-1934년, 1943년-49년 독립국가인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건립했으나 1949년 완전한 중국의 지배 체제에 편입된 위구르족들은 이후에도 무장 분리독립 운동단체인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이 주도하는 독립 운동을 벌여왔다. 중국 당국으로선 해결하기 힘든 `골치거리'였던 셈이다.
위구르 족의 분리 독립 운동과 함께 티베트 문제 역시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 건국한 이듬해인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주, 강제합병한 이후 티베트의 독립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전환점은 1959년 3월의 대규모 폭동으로 수천병이 희생되고 최고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이후에도 프랑스 등의 지지에 힘입어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티베트자치구에서는 해마다 크고 작은 시위가 발생, 중국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위구르와 티베트 외에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별다른 분리 움직임이 없지만, 중국 당국은 이번 위구르 사태의 파장에 긴장하는 분위기다.
중국 당국이 위구르와 티베트의 독립움직임에 초강경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이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에 느슨하게 대처할 경우 자칫 다른 소수민족들의 독립 욕구를 자극하게 돼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13억 전체 인구 가운데 92%를 차지하는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으며, 중국 당국은 분리 움직임을 막는 동시에 `소수민족 통합'을 위해 1980년대부터는 티베트와 위구르족 자치구로 한족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변경 안정화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시간을 두고 소수민족을 한족으로 동화시키겠다는 의도에서다.
그러나 위구르족과 한족 입장에서 이로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한족이 다수가 돼 결과적으로 '소수민족'이 말살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위구르족의 이번 유혈 사태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장위구르족은 중국 중앙정부의 이주정책으로 이미 신장위구르족 전체 인구 2천만명 가운데 위구르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46%로 낮아졌다고 우려하고 있다.
물론 중국 당국이 주류인 한족과는 달리 소수민족에게는 두 자녀 이상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고 대학입학 시험에서도 가산점을 부여할 뿐더러, 소수민족 자치구와 자치주의 행정수반을 해당지역 소수민족으로 임용하는 등의 유화적을 쓰고 있으나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조직의 부(副)는 돼도 정(正)은 못된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것.
실제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중국 중앙정부의 동화정책으로 뤄바(珞巴)족의 경우 그 수가 3천명에 그치는 등 이미 5개 민족이 1만명 이하의 인구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만주족을 비롯해 자기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린 민족이 늘어가고 있다.
옌볜조선족자치주 역시 조선족 인구가 30%에 불과해 머지않아 자치주 지위를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로 점차 한족과 동화돼 가고 있다.
분리 독립에는 강경하지만 다른 소수민족들에게는 따뜻한 손을 내미는 중국의 속내에는 시간이 지나면 12억의 한족들에게 결국은 동화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