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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이어티] 북한 헌법, 후계체제의 청사진

[소사이어티] 북한 헌법, 후계체제의 청사진

기사승인 2009. 10. 01.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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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제12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11년 만에 개정된 북한 헌법이 28일 언론에 공개됐다. 북한의 이번 헌법개정은 권력구조와 선거구제 개편 등을 놓고 한국에서도 개헌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 더욱 주목된다.

◇주요 변경 내용

이번에 개정된 북한 헌법은 총 7장 172조로 구성돼 있다. 총 7장 166조로 이뤄진 1998년의 개정 헌법에 비해 6조문이 늘었다. 특히 제6장의 ‘국가기구’ 편에 제2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새로운 절을 추가 신설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북한은 이번 헌법에서 ‘국방위원장’을 ‘최고령도자’로 규정해 ‘영구주석’으로 남아있는 김일성의 위상과 격을 맞췄다. 또 기존 헌법에서 국방위원회를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던 것을 ‘최고국방지도기관’으로 수정 명기해 사실상 모든 국가 현안을 다루는 국방위원회의 지위를 더욱 명확히 했다.

개정헌법에서는 1998년 헌법에 세 차례 나온 ‘공산주의’ 용어를 모두 삭제했다. 대신 기존의 ‘주체사상’에 ‘선군사상’을 병렬 표기했다. 개정헌법 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삭제는 북한이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할 것임을 천명하고, 이상적인 ‘공산주의’에 매달리는 대신 혁명목표를 보다 현실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최근 “공산주의는 파악이 안 된다. 사회주의는 내가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끌었다.

선군사상은 김 위원장이 권력에 오른 뒤 내세운 이데올로기다. 북한은 ‘선군정치’를 ‘군사선행(先行)의 원칙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라의 부강번영을 안아오는 영도방식’으로 규정하며 이를 북한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 가장 현실적인 영도방식이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이 이번 개헌으로 선군정치를 ‘제도화’한 것은 지난 1992년 4월 헌법 개정 때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삭제하고 주체사상을 내세웠던 전례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정헌법에 ‘인권’이 명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안이다. 8조는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된 노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며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98년 헌법에는 ‘인권을 존중하고’라는 문구가 없었다.

◇개헌의 시점과 내용별 의미
북한은 왜 2009년을 개헌의 시점으로 선택했을까. 전문가들은 북한의 후계구도와 대내외적 환경 변화가 북으로 하여금 개헌 카드를 꺼낸 요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조원 중앙대 교수는 “올 4월은 북한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회의를 한 시점”이라고 전제하며 “선군사상을 개정된 헌법에 넣은 것으로 보아 경제난이 지속되고 지난해 김정일 와병설이 겹치면서 북한이 일정 정도 한계에 부딪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북한은 최근 경제 활성화 조치인 ‘150일 전투’를 독려하는 등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후계 문제’에 방점을 두는 분석도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일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3남 김정은으로의 권력 승계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92년과 98년의 헌법개정 또한 김정일 후계체제를 강화하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권한을 강화함으로 후계체제를 공고화하는데 활용됐다”고 지적했다. 원만한 권력 승계를 염두에 둔 김정일과 김정은의 ‘공동통치’ 시대가 왔다는 분석이다.

개정헌법에서 ‘선군사상’이 강조된 것과 관련, 전문가들은 ‘선군사상’이 ‘주체사상’을 대체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의 ‘보완재’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위기 관리에 한계를 느끼고 이에 대한 보완 개념으로 선군사상을 활용하고 있다”며 “그렇다고 선군사상이 주체사상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주체사상은 세 가지 테제에 귀착된다. 인간은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민족은 자주적이어야 한다는 것, 인간이 만능무적이 되고 민족이 자주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 등이다.
개정 헌법의 전문에는 여전히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이 명시돼 있고 ‘사람중심의 세계관’ ‘인민대중의 자주성 실현’이 강조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선군사상’은 어디까지나 ‘주체사상’의 계승자 위치라는 의미다.

‘인권’을 명기한 것 또한 개정헌법에서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인권유린국의 범주에 포함돼 있다. 국제사면위원회 등 저명한 국제인권 NGO들이 북한인권보고서 등을 발간하면서 북한인권은 국제적 관심사로 부각됐다.
하지만 북한이 주장하는 인권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말하는 인권과 다르다. 김일성은 지난 1979년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서구의 인권을 “인민대중을 자기편에 끌어들여 부르주아들의 계급적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정치사상적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김정일은 1998년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라는 글에서 인권을 “정치, 경제, 사상문화를 비롯한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인민들이 행사해야 할 자주적 권리”로 규정함으로써 북한식 인권의 개념을 보다 확고하게 정립했다.


결국 북한이 개정헌법에 ‘인권’을 명시한 것도 국제사회의 압박에 ‘우리식 인권’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주장하는 인권은 북한식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주체사상의 하위개념으로 인지됨으로써 체제강화의 논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을 통해 본 북한의 권력구도 - 명확해진 김정일 체제의 의미
개헌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권력구도와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북한의 경우 누구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정헌법이 등장하기 전까지 법적인 북한의 대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김영남)이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북한이 이번 헌법 개정에서 ‘국가기구’ 부분에 ‘국방위원장’을 추가한 것은 국방위원장을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명문화했다는 의미가 있다. 개정헌법은 국방위원장과 국방위원회의 개념 구별도 명확히 했다. 국방위원장은 국가의 사업 전반과 국방위원회의 사업을 직접 지도하는 ‘최고령도자’로, 국방위원회는 국방위원장의 명령에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을 폐지해야 하는 의무를 지는 등 국방위원장의 하위에 있는 국가기관으로 각각 규정하고 있다.

이번 헌법개정의 핵심을 차지하는 ‘선군정치’ 또한 북한 권력구조의 개편과 직결된다. 개정 헌법에서 ‘선군사상’을 강조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명기한 것은 최고인민회의와 상임위원회와는 별도로 국방위원회가 내각과 정보기관, 군을 거느릴 수 있는 합리적 명분을 찾기 위한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개정헌법에서 김일성을 영원한 수령으로 명기했던 1998년 헌법의 서문을 한 자도 수정하지 않은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98년 헌법에는 1972년 헌법에 없던 서문을 새로 규정했었다. 북한은 98년 개정에서 자국의 헌법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헌법’으로 규정했다.

이번에 개정된 헌법에서 북한이 김 위원장의 선군사상을 김일성 주석의 주체사상과 병기하면서도 ‘김일성헌법’임을 강조한 것은 김일성 주석의 ‘계승자’로서 김 위원장의 위치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김정일 이후 ‘3대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다. 표면적으로는 ‘김일성헌법’이지만 사실상의 ‘김정일헌법’을 완성했다는 의미다.

북한은 1948년 제헌헌법에 이은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정 때 주체사상을 명시하고 국가주석제를 도입한 바 있다.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유일사상을 제시하며 통치이념을 정착시킨 뒤 김정일로의 부자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김일성주의화 단계’를 수립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1992년 헌법개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1998년 국방위원회 위원장 권한을 강화함으로 김정일의 권력을 강화시켜 왔다. 이번 헌법 개정이 권력구도 차원에서 ‘김정일-김정은 후계구도’를 정립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지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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