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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찰서 사무실 내부. 대구경찰서는 완공 당시 국내 최대 규모와 최식식 시설을 자랑하고 기념엽서를 발행했다 |
“사전은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 고백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진실의 기록서를 만들어놓고 반성하고 화해하자.”
내년으로 다가온 2010년, 일본의 식민통치가 있은 지 100년을 기록하는 새해를 앞두고 세상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내년 광복절엔 한국과 일본의 100여개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시민실천대회가 예정돼 있어 의미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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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공립농업학교 졸업앨범의 한 장면(1941년).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동원된 학교생활이 군대와 다름없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
애초 2005년 발간 예정이던 친일인명사전이 4년이나 늦게 세상의 빛을 보려는 순간 또 한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지난달 8일 발간 보고회장으로 예정됐던 숙명아트센터의 대관이 취소되는 바람에 졸지에 효창공원 백범 묘소로 장소가 옮겨진 것이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숙명여대로부터 숙명아트센터를 위탁받아 운영하는 S사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법원에 낸 상태다. 임헌영 소장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공안사건이 아니다. 갑자기 대관이 취소될 이유가 없었다”며 “단지 손해배상금을 받기 위한 취지가 아니라 다시는 이런 부당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말했지만 친일인명사전은 처음 계획보다 4년이나 늦게 발간됐다. 지난 2001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에 착수한 이후로 보면 8년만이다. 그리고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설립으로 보면 18년이 흘렀고, 1966년 고 임종국 선생이 ‘친일문학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친일문제를 정면 제기한 때로 보면 43년만이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 이후 60년이 지났다.
연구소 측은 친일인명사전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처음부터 연구 성과가 있는 상태에서 사전 편찬이 계획된 것이 아닌 까닭에 과정마다 걸림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임 소장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친일문제는 금기 영역이었던 데다 축적된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거의 맨바닥부터 시작한 셈”이라고 말했다.
이번 작업을 위해 편찬위원회는 처음 ‘모(母)집단’이라고 불리는 조사 대상자 2만명을 추출했다. 이후 이들을 대상으로 20개 전문 분과위에서 각 기준을 세워 추려낸 인물이 4880명이다. 그리고 편찬위가 최종 일제 강점기 시절 친일파로 활동한 것으로 발표한 인물은 438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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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방한 후 이를 기념해 만든 기념엽서들. 그 가운데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을 같은 색으로 칠해 이곳이 일본의 영토임을 과시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
친일인명사전은 매 편찬 과정마다 각종 이슈를 만들어낼 정도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특히 작년 편찬위에서 사전에 수록 예정인 추가명단을 발표하자 120여건에 달하는 이의신청이 쏟아졌다. 편찬위는 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고, 이로 인해 일부 보류나 유보된 인물도 나왔다.
이 중에는 법원에 친일인명사전 발행정지 가처분소송까지 제기했다가 결국 명예를 지키게 된 고 신현확 총리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당초 신 전 총리를 친일파로 규정한 것은 1943년 고시에 합격한 뒤 일본 상공성의 수습사무관으로 근무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 신 전 총리를 조선총독부가 아닌 일본 본토의 사무관으로 임명한 것은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상징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주도한 사실만으로도 친일파로 낙인찍을 수 있는 근거는 충분했다는 것이 편찬위의 애초 견해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신철식(55) 전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은 “아버지가 일본 정부로부터 임명은 받았지만 끝내 부임하지 않고 국내로 돌아왔다”고 주장했으며, 신 전 차장의 소송 제기 이후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에서 직접 자료를 찾아내 그의 주장은 사실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해 연구소 측은 “일제 치하에서 특전이 보장된 고등관 승진은 명백한 친일파의 기준이 됐다”며 “그러나 사전 편찬 과정에서 신 전 총리의 오해가 풀린 만큼 오히려 친일인명사전의 색깔론 공세도 허구인 것으로 증명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인 유치환도 이번 사전 등재에서 보류됐지만 편찬위 측은 “유치환 시인의 경우 그가 남긴 시와 논설에서 친일의 색깔이 짙다”고 평가하고 있다. 임 소장은 “대개 문학작품의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의 문학이 갖는 특유의 알레고리가 있다”며 다만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1942년 이후 신문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이번에 보류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끝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와 장지연 매일신보 주필 후손들은 법원에 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냈으나 기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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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그렇다면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 이에 대해 편찬위 관계자는 “일제의 요구가 시기마다 달랐던 점을 감안할 때 친일파 역시 역사적인 개념으로 분류했다”고 말했다.
우선 1910년은 식민지화의 시기로 일본이 각종 조약을 요구하던 것과 관련해 매국 행위 사건에 주목했다. 이후 식민통치 시절로 접어든 1910~1937년은 통치구조와 관련된 사건과 고급 관리가 대상이 된다. 따라서 고등관급(지금의 사무관) 이상으로 기준을 삼았고 여기에 군수, 판·검사, ‘경부’ 이상의 경찰, ‘소위’ 이상의 군인이 대거 포함된 것이다.
또 1937~1945년은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천황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새로운 형태의 친일파가 등장했다. 따라서 황국신민화 교육 등을 담당했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 종교인이 유독 많다.
친일파로 선정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지 않냐는 질문에 편찬위 관계자는 “해방 직후 추산된 숫자는 20만여명이 넘었고, 반민특위에서 조사 대상만 7000여명이었다”며 “이번에 학계에서 당사자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범위로 최대한 줄여 오히려 관대한 결과였다”고 잘라 말했다.
편찬위에서는 무엇보다 친일인명사전이 ‘증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때문에 사전에서 당사자 외에 가족 누구의 이름도 거명하지 않았다. 즉 친일인명사전은 특정 개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공인에 대한 자료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편찬위 관계자는 36년간 일제강점기에 대해 “똑같이 일하고도 단지 피가 다르다는 이유로 일본인과 다른 대우를 받았던, 한마디로 민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시기였다”고 정의 내린다.
지금 사회 일각에선 여전히 조사관이나 그 가족의 역사가 친일파로 분류된 이들보다 얼마나 더 당당한지 묻고 있지만, 친일인명사전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평가와 가치를 남길 것인지 비로소 후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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