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최정호 칼럼] 그리스 세계의 주역들

[최정호 칼럼] 그리스 세계의 주역들

기사승인 2010. 05. 14. 11:0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최정호 최정호성형외과 원장(의학.심리학박사)
 

페리클레스
출처 대영박물관


그리스세계의 주역들

[아시아투데이=이순용 기자]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사치하지 않으며, 지혜를 사랑하지만 나약한 의지에는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부를 개인적 과시의 수단이 아니라, 공공의 봉사를 위한 도구로 간주한다. 우리는 가난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며, 단지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음을 수치로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이 개인적인 일뿐만 아니라 공적인 일에도 관여해야 한다고 믿거니와, 이는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무관심한 자로서 뿐만 아니라 쓸모없는 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  ‘추도연설’중 “아테네인의 이상”


페리클레스 시대는 아테네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시대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아테네의 승리와 부의 축적은 안팎으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 첫해(메가라 원정 ;기원전 431년)에 페리클레스는 전몰자 추도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그리스 세계는 기본적으로 민주적 정치풍토가 요구되는 지정학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공적인 역할에 무관심한 사람을 쓸모없는 자라고 선언 할 만큼 개인의 정치적 역할이 중요한 의무이자 권한이었다. 이러한 특별한 체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역사적 맥락을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혀 줄 것이다.


미케네 문명의 붕괴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중대한 재앙이었다. 야만적인 도리아인의 침공으로 거의 모든 기록은 사라졌고, 문화는 더 단순한 형태로 퇴보하였다. 겨우 작은 촌락 공동체를 유지하며 외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정도의 지배 권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내용은  이 시대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제공해 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기원전 800년쯤을 즈음하여 촌락 공동체는 더 큰 정치적 단위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여 도시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 전역에 도시국가들이 등장하여 경쟁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도시들이 테베, 아테네, 코린토스, 스파르타등이었다.  소아시아에서는 밀레투스, 사모스등이 등장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인구가 약 40만 명 정도가 되었는데, 두 도시는 다른 인근도시에 비해 인구가 대략 3배에 정도가 많았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도시는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코린토스와 아르고스였고 기원전 7세기 경 에는 스파르타가 번성하였다. 기원전 6세기 경 에는 소아시아의 밀레투스가 그리스세계의 문화의 선진도시로서 과학과 철학의 꽂을 활짝 피웠다. 소위 말하는 밀레투스학파가 ‘생각의 발견자’로서 등장하였다. 아테네는 적어도 100년은 뒤떨어져 있었다.  미케네와 크레타 문명을 주도했던 이오니아 세력은 소아시아를 비롯한 동방으로 진출했고, 침략세력인 도리아 세력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쪽에서 식민지를 찾았다. 그리스인들은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수세기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여 지중해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수 백 개에 달하게 되는 데 그들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신학적 토대도 비슷할 뿐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 동일한 종족으로 여겼다. 시기에 따라 주도권을 행사하는 도시들이 달랐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을 동반했다. 비교적 많은 기록이 남아있어 도시들 간의 합종연횡이 알려져 있으나 최후까지 주역을 담당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 먼저 앞서갔던 스파르타부터 간략하게 알아보자. 스파르타는 그리스세계를 관통하는 엄격한 전통주의를 형성한 한 축이다.


* 스파르타의 영광과 몰락

그리스 신화에서 라케다이몬은 제우스와 뉨페 타위게테의 아들이다. 그는 에우로타스의 딸 스파르타와 혼인하여 아뮈클라스, 에우뤼디케, 아시네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나라인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으며, 도읍의 이름은 아내의 이름을 따랐다. 대대로 스파르타의 왕들은 전설속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직계후손으로 여겨졌다.

리쿠르고스( 기원전 800년? ~ 730년)는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로서,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에 따라 스파르타 사회를 군국주의로 개혁하였다. 리쿠르고스의 모든 개혁은 스파르타 사람의 세 가지 덕목인 (시민간의) 평등, 군사적 적합성, 엄격성을 지향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당시의 그리스세계

출처-엔사이버


 스파르타는 군국주의 국가였다. 애초 도리아인 침략세력인 그들은  미케네를 멸망시키고 군사국가 체제를 지향했다. 오늘날의 엘리트 독재국가와 비슷한 정부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그들은 법적인 통치제도를 지극히 존중했다. 1차 메세니아 전쟁(기원전 743-724?)은  20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1차 전쟁에서 스파르타인들은 이미 메세니아인들을 헤일로타이로 삼고, 제2차 전쟁에서는 반란을 진압하여 스파르타의 지배를 공고히 확립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펠로폰네소스와 다른 그리스 지역의 맹주로 라코니아 평원을 장악한 그들에게 기원전 640년경에 일어난 메세니아인들의 반란은 그 후 스파르타인의 행동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반란에서 스파르타인은 거의 패배할 뻔 했고 그들은 다시는 반란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하여 가혹하고 엄격한 정책을 취했다. 메세니아인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들을 헤일로타이(노예)로 만들었고 노예에 비하여 작은 수의 시민 계급의 우월성 확보를 위하여 시민 개개인에게 엄격한 규율과 복종을 요구하였다.


기본적으로 노예숫자의 5%정도의 적은 시민으로 노예를 다스려야했던 스파르타는 노예들을 철저히 다스리고 경멸하였다. 왕은 한명이 아니라 유력한 가문을 대표하는 두 명이 있었다. 원로회의가 있었지만 실재적인 최고 권력은 5명으로 구성된 감독관위원회가 행사했다.  이들은 원로회와 민회를 주재했고 ,시민생활을 전반적으로 통제할 권한을 가졌으며, 심지어 왕까지도 폐위시킬 수 있는 절대권한을 행사하였다. 스파르타에서 노예는 말 할 것도 없고 시민계급들까지도 사실상 일생의 대부분을 고귀한 노예로 지내야만했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건강을 시험받아야했고, 허약하다고 간주된 아이는 살해하였다. 군사훈련은 7살 때부터 시작되었고 남자들은 20세부터 60세까지 거의 모든 시간을 국가를 위한 봉사에 바쳤다. 시민계급 전체는 헤일로타이(노예)의 노동에 의해 부양을 받았고, 시민계급은 농업이외에 어떤 경제활동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경제는 스파르타정부가 억압적이었던 만큼이나 정체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정학적 위치와 마땅한 항구가 없던 스파르타는 농업국가 였고, 국가전체가 병영처럼 운영되었다.


 영화 ‘300’은 멋진 장면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고증된 스파르타의 정치제도와 가치관, 사회 경제적 환경을 보여주었다.  페르시아 전쟁 시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조국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하는 레오니다스왕은 스파르타뿐만 아니라 그리스전체에 깊은 영향을 던진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도 과두정과 민주정의 체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쟁과 계급투쟁이 격렬하였다.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세계는 가장 큰 기여를 한 아테네를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인정하였고 아테네는 수 십 년 동안 아테네 제국주의를 실현하면서 전성기를 누린다.  수 십 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세계를 피폐하게 하였다.  승리한 스파르타는 짧은 영광 뒤에 곧바로 몰락하게 된다. 잠시 도시국가 테베가 패권국가로 떠올랐다. 페르시아가 더 이상 강력한 위협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패권을 차지하기위한 잔인한 전쟁 뒤에 전제적 왕정 체제의 마케도니아에게 지배권을 넘겨주게 되는데 다시는 그들의 ‘영광’을 회복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


억압적인 군사국가 이었던 스파르타에서 문화는 보잘 것이 없었다. 그들이 후손들에게 남긴 유산은 ‘스파르타식’이라는 가혹한 방식을 빗대는 ‘단어’정도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가장 강력한 스파르타주의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비난하였다. 아테네 정치사는 친스파르타주의와 반스파르타주의의 대결구도로 볼 수 도 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가장 잔인한 살육을 자행한 측은 스파르타가 아니라 아테네인들이었으며 여성의 권리를 폭넓게 인정한 나라는 스파르타였다.  군사국가 스파르타는 전쟁 머신으로서는 승리를 이루어냈지만 그리스전역을 통치할 만한 정치력도 없고, 인구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371년의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베군대에 패배할 때 까지 스파르타는 지상에서 무적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지속 되었던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전역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전쟁으로 국토는 피폐해지고 국고는 바닥이 났다. 


빈약한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 하에 있던 북쪽의 마케도니아는 필리포스2세의 개인적인 능력에 힘입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기원전 338년의 카이로네이아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명실상부한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때에도 유일하게 스파르타만이 굴복하지 않고 코린트동맹에 가입을 거부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2세도 그의 아들 알렉산더도 스파르타 침공의 위험을 감수 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세계에서 무적의 육군 군사국가의 명성을 유지하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우리는 스파르타에 대한 기록을 그들의 손이 아닌 헤로도투스, 투키디테스, 크세노폰같은 이오니아인들의 손으로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기록에 명백하게 편견과 폄하가 끼어들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마라톤’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의 아들인 키몬은 대표적인 친 스파르타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그와 대립했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의 괴멸이 아테네의 영광에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의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시라쿠사의 원정길에 소환당한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앞잡이로 협조자가 되자  아테네의 패배는 배신자에 의해 더욱더 가속되게 되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와의 연대와 대결을 바꾸어 가며 그리스세계의 패권을 도모하였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시대 때 만들어진 두 체제 즉 민주정과 과두정의 한 체제로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체제논쟁의 핵심의 한 축이다. 그 후의 역사에서 오히려 급진적인 아테네방식은 실현되지 못했고 오히려 스파르타방식의 과두정이 대부분 문명의 정치체제가 되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세계의 양대 정신적 경향중 하나인 도리아 문화를 대표한다. 도리아 문화는 전통을 숭상했고, 군인들이 이끌었다. 도리아문화는 철학과 예술에 있어서는 항구적인 규준과 미를 지배하는 불변의 법칙을 추구했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그리스 세계의 도리아 전통을 계승하였다. 스파르타의 역사적 평가가  폄훼된 이유는 이룰 수 없었던 아테네식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근대세계의 정신이 꾸며낸 측면이 있어 보인다. 


 인간은 상황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아테네의 영광은 페르시아 전쟁 후 시작된 아테네 제국주의에 의해 촉진되었고 그 제국주의적 욕망은 아테네를 다시 몰락시켰다. 페리클레스는 황금의 아테네를 건설하였지만 바로 그의 정책에 의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불러들였다. 
최정호 최정호성형외과 원장(의학.심리학박사)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