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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구원 통일안보중앙협의회장. /이병화 기자photolbh@ |
이들은 비록 살아남기는 했지만 참전, 포로 수용, 석방 등 전쟁의 아픔과 참혹함을 최전선에서 겪으면서 큰 정신적 충격과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포로문제는 1951년 7월부터 시작돼 2년여의 시간을 끈 정전협정 협상과정에서 최대 쟁점이었다.
각각 한차례씩 물리적으로 한반도를 거의 점령했던 유엔측과 공산진영은 사실상 군사적 해결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정전협정이라는 정치적 해결에 나섰지만 포로송환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7~18만명(북한군 15만여명, 중공군 2만2000여명)으로 추정되는 공산군 포로 처리가 핵심쟁점이었다.
협상에서는 유엔측의 포로 개개인 자유의사에 따른 자원송환 방침과 공산진영의 제네바협정 118조를 근거로 한 전원송환 방침이 팽팽히 맞섰다.
유엔측이 자원송환 방침을 내세운 것은 공산군 포로 가운데 10만여명이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국군 또는 남측의 민간인이 공산군에 포로로 잡힌 뒤 인민군에 강제 편입된 경우가 많았던 탓이었다.
또 공산군 포로가 17~18만명인데 비해 유엔군측 포로는 10만명(국군 8만8000여명, 유엔군 1만1500여명)에 불과했다는 점도 유엔측이 자원송환 방침을 내세우게 된 배경이 됐다.
전쟁이 승자도 패자도 없이 마무리되고 포로송환 문제가 양측의 체제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이데올로기 문제로 비화되면서 협상은 총성 없는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남측출신의 반공포로 송환문제를 놓고 빚어진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측의 갈등은 포로송환 문제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가운데 남측출신의 비무장지대 내 중립국송환위원회 이송에 반대했지만 공산진영과의 정전협정을 주도한 미국은 이를 수용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전격 석방과 미국의 이승만 축출 계획 수립으로까지 이어졌다.
갈등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원조, 한국군의 20개 사단 증강 지원 등을 약속받으면서 일단락됐다.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정전협정 협상이 장기화되면서 포로수용소 내에서는 희생자가 속출했다.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가 각각 ‘해방동맹’과 ‘대한반공청년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철조망 안에서 그들만의 전쟁을 치렀다.
대한반공청년단을 계승한 통일안보중앙협의회의 손구원 회장은 “아침이면 한쪽에서는 태극기가 올라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공기가 올라갔다”며 “미군은 외부감시만 할 뿐이어서 안에서는 항상 대립상태에서 살생과 폭력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포로들의 수난은 석방과 전쟁 이후에도 계속됐다.
우선 반공의 날의 기원이 된 1953년 6월18일 석방부터가 미군의 동의 없이 전격 단행됐기 때문에 포로들에게는 사실상 ‘탈출’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2만7000여명의 반공포로가 석방됐지만 미군에 의해 재수감되거나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 때 석방되지 못한 나머지 송환 거부 포로 가운데 2만2000여명은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 내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이송된 뒤 1954년 1월23일 석방됐는데 이는 자유의 날의 기원이 됐다.
반공포로는 전쟁 이후에는 ‘반공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인민’이 아닌 ‘국민’의 지위를 얻게 됐지만 국가기관의 일상적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한 때 인민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많은 반공포로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군대와 경찰에 재입대해 신분을 ‘세탁’해야만 했다.
그러나 군대와 경찰 내에서도 그들에게는 유리천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 승진 등의 대우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
손 회장은 “오로지 반공 때문에 부모형제와 고향산천까지 버리고 대한민국에 남았는데 정부가 반공포로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다”며 “연금이나 지원을 해달라는 게 아니다. 다만 서글픈 노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 회원들의 명예, 입지만은 세워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로와 관련해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석방과정에서 제3국행을 선택한 이른바 중립국행 포로문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을 통해 잘 알려진 76명의 중립국행 포로들은 전쟁 이후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나뉘어 정착했다.
이들은 친공과 반공 양측의 살육과 학살에 혐오를 느껴 제3국행을 선택했지만 자살로 막을 내린 광장의 이명준과는 달리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제 불과 510여명 가량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내 국군포로 송환 문제도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정전협정 당시 국군포로는 8만8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지만 정작 송환된 포로는 8343명에 그쳤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올해로 60년이 됐지만 시대의 아픔인 전쟁포로의 상처는 여전히 깊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