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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인 칼럼]정적의 아들도 정적?

[김영인 칼럼]정적의 아들도 정적?

기사승인 2011. 01. 1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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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인 논설위원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오는 얘기다.

"남인 최우형(崔遇亨)은 잇달아 청직(淸職)에 발탁되어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봉군 등의 요직을 거쳐 충훈부까지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 수레를 타고 북촌(北村)에 도착하여 코를 가리며, '노론의 냄새가 어찌 이리 고약한가' 하였다.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노론이 살았다. 그 남쪽은 남촌이라고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당(三色黨)이 살고 있었다."

황현은 나라가 기울던 조선 말 사람이었다. 당시 고위층에 있다는 사람의 사고방식은 이랬다. 힘을 합쳐서 나라를 살려볼 생각은커녕, 당쟁을 일삼고 있었다. 상대편의 냄새조차 싫다며 기피하고 있었다. 냄새가 싫어서인지 서로 사는 동네까지 달리하고 있었다.

사는 곳뿐 아니라, 옷차림도 달랐다. 노론은 저고리 깃과 섶을 둥글게 접었다. 소론은 모나게 접었다. 그 아내들의 옷차림도 남편을 따르고 있었다. 노론의 여자는 치마주름을 굵게 했다. 소론의 여자는 치마주름을 가늘게 했다.

말투마저 달라서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왕래하는 일도 드물었다. '소통'도, '상생'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랬으니,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딴 나라 사람이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진작부터 그 '딴 나라 현상'을 개탄하고 있었다.

"…하나가 갈려 둘이 되고, 둘이 갈려 넷이 되고, 넷이 갈려 또 여덟이 되었으며, 대대로 이어져 구름처럼 불어났다.… 길한 일, 흉한 일에 조문을 가면 다른 당파 사람과 내통한다고 비방하고, 혼인을 하게 되면 무리 지어 모여서 배척하고 공박한다. 언동과 의복까지 다르게 하기 때문에 길에서 만나도 뚜렷이 알아볼 수 있으니 풍속이 딴 나라 사람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임금의 '왕통'을 이을 원자(元子)를 얻는 것은 나라의 경사였다. 원자가 태어나면 옥에 갇혀 있던 죄수를 풀어주고, 특별 과거를 베풀어서 경축했다.

숙종 임금은 어렵게 득남할 수 있었다. 첫 왕비 인경왕후와,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에게서는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 '장희빈'을 만나고 나서야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당쟁은 임금의 득남을 경사로 여기지 않았다. 아이는 낙인이 찍힌 채로 태어나야 했다. '남인'이라는 낙인이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남인이기 때문에 아이 역시 남인이어야 했다. 극심한 당쟁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까지 편가르고 있었다.

이 '편가르기 유전자'는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은 듯싶었다. 젊은 청년이 일류대학 '로스쿨'에 합격했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그 부모에게도 "축하한다"는 인사말 정도는 건넬 만했다. 그러나 축하 따위는 없었다. 되레 부정 입학이라는 '묻지마 폭로'였다. 청년이 정치하는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 정치판에서는 정적의 아들도 정적 취급이었다. 정치와 무관했을 청년은 아버지의 직업 탓에 아마도 정신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성호 이익은 당쟁으로 편이 갈라지는 이유를 이해 타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무릇 이(利)가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黨)이 둘이 되고, 이가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것이니, 이가 고정되어 있고 사람만 많아지면 십붕팔당(十朋八黨)으로 가지가 많아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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