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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남의 리얼 차이나 (4) 애증의 일본

추정남의 리얼 차이나 (4) 애증의 일본

기사승인 2011. 02. 0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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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남 기자] 대만에 처음 도착해서 줄곧 신기하게 느껴진 것은 이 작은 나라 사람들이 ‘타이위’ ‘구어위’‘커지아위 ’‘르위’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타이위는 대만 지역 사람들이 쓰는 방언이고, 구어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국어지요.
커지아위는 광둥성과 장시성 남부 지역에서 쓰는 방언인데 이들 지역 중국인들이 대만으로 많이 넘어오면서 커지아위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르위는 일본어로 장기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은 탓에 노인들은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이베이의 경우 수도인 탓에 국어인 중국어를 쓰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조금 떨어진 타이중만 해도 대부분이 타이위를 씁니다.
구어위를 할줄 안다해도 발음이 너무 강해서 알아듣기가 힘들어 신경써서 듣다보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머리가 아프죠.
대만 중남부를 여행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만의 언어가 다양한 것은 이들의 역사와 관련이 깊습니다. 여행을 한다치면 그 나라의 역사는 어느 정도 꿰고 있어야겠죠?

16세기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인에 의해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포모사(Formosa)’라 이름 붙여진 대만은 남부를 통해 들어온 네덜란드 인에 의해 최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후 정성공이란 사람이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항청복명(抗淸復明:명나라의 회복을 위해 청나라에 대항한다)을 외쳤으나 23년만에 다시 청나라에 의해 패배, 대만은 청나라의 땅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대만을 식민 지배할 당시 석탄을 나르기 위한 철도를 부설했다. 사진은 타이베이 근교 루이팡에 있는 석탄철도.                                           사진=추정남 기자
이후 청일전쟁 에서 패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고, 이로써 대만은 5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1945년 세계 2차대전의 종결로 대만도 광복을 맞이 했으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정권이 다시 대만으로 들어오면서 지금의 체제가 시작됐습니다.

이런 역사적 연원으로 대만에는 여러 나라 말들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어로 치자면 일본어의 영향이 가장 큽니다.

한 일본 학자(당시 유학생)가 쓴 ‘일본인은 대만에서 무엇을 했는가’라는 책을 보면 대만의 일본에 대한 호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국어와 영어에 서툴었던 작가가 어떻게 음식을 시킬까 걱정하자 친구는 “일본어면 다 통해”라며 “てん-どん (텐동:새우튀김을 올린 덮밥)하나요”라고 일본어로 주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이 한 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에서 일본 교사를 만나 나눈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리 총통이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일본인입니까? 당신은 당시(일본 통치시기) 선생님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일본인 교사는 “저는 대만을 좋아해서 지금도 대만에 일년에 한번씩은 방문합니다. 대만이 하루하루 발전하는 것에 놀랍고 기쁩니다.” 라고 답합니다.

그 말에 리 총통은 “그것이 다 당신이 가르쳐놓은 씨앗들이 자라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라고 답하죠. 마지막 이 전 총통의 말은 그가 친일 인사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금은 충격적입니다.

흔히들 대만이 당시 일본의 통치를 환영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일본이 대만으로 들어와 실시한 여러 정책들- 이를테면 호적과 토지관리, 화폐발행의 통일, 전신사업, 철로부설, 항구 건설 등- 이 괜찮은 정책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가 다른나라의 지배를 환영하겠습니까.
 
2009년 개봉한 ‘난징!난징!’이란 영화는 대만 국립정치대학교에서 처음 상영되었습니다. ‘난징!난징!’은 남경대학살을 주제로 하고 있어 일본에서 상영 금지된 바 있죠.

대만 곳곳에서 일본어로 된 간판을 볼 수 있다.
                                      사진= 추정남 기자
   
국립 정치대학교는 국민당 당교(黨校)로 첫 개봉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학살의 대상이 바로 대만 국민당이었으니까요.

들리는 바에 의하면 영화를 본 대만인들이 함께 영화를 보기위해 온 일본인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장소에서 만큼은 일본에 대한 반감의 분위기가 짙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대만 곳곳에서 보이는 일본 간판들과 일본 상품들,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대만 노인들을 생각해보면 대만은 우리 처럼 일본에 애증(愛憎)을 함께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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