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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 정부가 재벌들의 계열 대기업에 대한 ‘일감 물량 몰아주기’, 특히 비상장 계열사 부당 지원을 통한 ‘부의 대물림’에 대한 과세 방침을 천명, 귀추가 주목된다.
기획재정부(장관 윤증현)과 국세청(청장 이현동) 등은 31일 국세청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공정사회추진회의에서 조세정의 실천방안을 발표했는데, 그 일환으로 대기업의 계열사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검토 방침이 포함된 것.
이는 대표적인 부당 내부거래이자, 해당 기업 및 주주에 대한 배임 소지가 다분하고, 부의 편법 이전 등 변칙상속 및 증여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그동안 이렇다 할 제재 및 과세 수단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실현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재계의 반발에다 현실적 제약도 적지 않아, 실현가능성은 미지수라는 관측도 있다.
◆출발점은 공정사회론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과세 추진의 배경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 제기된 공정사회론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작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며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또 “공정한 사회에서는 승자가 독식하지 않고, 모든 지역이 함께 더불어 발전하는 사회”라고 설명했다.
이번 조세정의 실천방안은 한국조세연구원(원장 원윤희)의 연구용역이 뼈대가 됐다.
최근 이 연구원 박명호·정재호 연구위원은 ‘공정사회와 조세정책’이라는 연구보고서에서 공정사회론을 먼저 언급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세정책은 자율, 공정한 경쟁과정, 책임의 기능과 역할에 초점을 맞춰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탈세 방지와 체납 축소를 통한 공정사회 기반 구축, 성실납세자 우대, 소득 종류에 따른 세부담 격차 완화, 기부 장려 등을 제안했는데 이중 상당부분이 이번 정부대책에 포함됐다.
이날 회의에서도 이 대통령은 “국민들은 공정사회를 추진해 나가는데, 납세와 과세에 관련된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면서 “성실하지 못한 납세자나 기업이 있을 때, 국민들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성실한 납세자, 투명한 경영을 하는 기업은 존중하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아주 ‘공정’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문했다.
◆편법적 부의 대물림 겨냥
특히 이번 대책은 편법적 부의 대물림을 막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수단이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 추진이다.
실제 재벌 계열사들이 비상장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줌으로써, 대주주 혹은 재벌 2세에게 부를 이전하는 관행이 재계에 만연해 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금융감독원(원장 권혁세) 전자공시시스템과 재벌닷컴(사장 성선섭) 등에 따르면, 자산순위 30대 그룹 가운데 재벌총수의 자녀가 대주주로 있는 20개 비상장 계열사의 내부거래 비중이 절반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말 기준 이들 20개 비상장사의 매출액 7조4229억원 가운데 계열사 매출이 46.1%인 3조4249억원으로 집계됐다.
상장사 포함, 전체 계열사 평균 내부거래 비율인 28.2%를 훨씬 웃도는 수치다.
이들 20개 비상장사의 실적은 5년 사이 평균 3.27배로 급증, 재벌 계열사들이 오너 자녀가 대주주인 비상장사에 거래물량을 대거 밀어줬음을 짐작케 한다.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의 장남 장세준씨 등 자녀들이 지분 33.3%를 보유한 영풍개발의 경우, 지난해 전체 매출 132억원 중 계열사간 매출이 무려 98.1%에 달하며,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장·차녀가 주식의 18.61%를 갖고 있는 롯데후레쉬델리카는 매출 584억원 중 계열사 비중이 97.5%였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아들 이현준씨 등이 대주주인 티시스는 계열 내부 매출비중이 90.5%,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의 장남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대림I&S는 82.4%,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자녀들이 100% 보유한 GS아이티엠도 80.8%에 이른다.
상장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례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의 장남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글로비스의 경우, 그룹 관련 물량이 전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사업보고서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의 물류를 담당하고 있는 기업’이라고 돼 있을 정도다.
한편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김동수)는 최근 태광그룹 9개 계열사가 골프장 회원권 취득을 가장, 오너 일가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동림관광개발에 부당 지원을 한 혐의로 4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태광산업과 흥국생명 및 대한화섬 3개사는 검찰 고발까지 했다.
◆정부 과세방안 검토 착수
정책발표 이후 정부는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 상속·증여에 대한 합리적인 과세 방안이 무엇인지, 조세정책과 세무행정 등 분야별 검토에 착수했다.
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실질적으로 어디까지를 과세대상으로 할 수 있는지, 방법은 어떻게 할지를 구체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며 “이제 막 검토를 시작한 단계로, 밝힐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세법개정안이 8월에 완성되므로, 그때까지 구체적 방안을 내 놓겠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합리적인 과세 기준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며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 용역을 의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세청은 법인세보다는 상속ㆍ증여세를 근거로 징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데, 다만 다른 회사들과 같은 조건으로 일감을 맡겼는데 단순히 자녀가 소유한 회사라고 상속·증여세를 부과하는 것은 형평성 논란이 있어 고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대책발표에선 빠졌지만, 이 문제는 공정위는 물론 상법과도 관련돼 있어 법무부(장관 이귀남) 소관사항이기도 하다.
정부는 지난 2007년 공정거래법 시행령을 개정, 일감 몰아주기를 ‘부당지원 행위’로 규정한 바 있다.
또 올해 3월에는 오너나 경영진이 기업의 유망한 사업기회를 부당하게 빼앗아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상법 회사편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 내년 5월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이 문제는 그동안 재정부와 법무부가 나서지 않아 공정위만 부각된 측면이 있다”며 “일감 몰아주기 등 내부거래라 하더라도 ‘부당’하냐 안하냐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회사 기회유용 행위에 대해서는 과세하고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다“며 ”필요할 경우 공정거래법을 더욱 강화하는 등 제도개선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재계 반발, 법적 문제점도
하지만 이제까지 정부가 이 문제에 선뜻 나서지 못한 까닭은 일감을 몰아줬다고 해서 이를 모두 불법 혹은 탈세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과징금을 매기더라도 법원에서 패소하는 경우가 많아, 공정위로서도 조심스럽다”면서 “이번 태광산업 건처럼 사안이 명백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동안 조사와 제재에 소극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04년, 2007년과 2009년에도 정부가 과세 방안을 검토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도 실제 법적용이 어려워서다.
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상속·증여세법상의 ‘포괄주의’ 규정을 적용, 증여세를 과세하거나 소득세법을 개정해 자본이득세를 물리는 방안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정부의 과세방안 검토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애널리스트는 “대기업 계열사들이 그룹내부 물량을 받는 것은 거의 당연시되고 있는 일인데, 이에 대해 과연 세금을 부과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재계의 반발과 국회 로비 등도 당장 넘어야 할 큰 산이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현재 기업들이 상속·증여와 관련, 꾸준히 개선되고 있는 추세”라며 “물량 몰아주기에 대한 세금부과는 기업들에게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성장성 측면에서, 이 문제를 부의 대물림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인철 한국경영자총협회 기획홍보본부장도 “계열사를 통한 일감 몰아주기와 변칙상속 등은 모두 과거의 일”이라며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과세정책으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