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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환 기자

승인 : 2011. 04. 28. 07:08

[이념대립 이대론 안된다]④ 대한민국 좌우파 분열의 역사
[아시아투데이=홍경환 기자] 이념 과잉의 시대. G20 정상회담을 주도하고, 국내총생산(GDP) 순위가 13위에 달하는 대한민국이 ‘이념 대립’으로 한 발 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치·시민사회는 좌·우로 나뉘어 국론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일등공신은 정치권이다. 4.27재보선 과정에서도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는 “지금 좌파 세력은 야합해서 분당뿐만 아니라 강원도, 김해, 순천에서 대한민국을 통째로 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좌파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우파인 자신에게 표를 몰아 달라는 이야기였다. 강 전 대표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 주요 관계자들은 야당을 ‘좌파=친북=포퓰리즘’이라는 프레임에 가둬두기 위해 치밀한 계산 하에 잇단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정치사상적 의미의 좌․우파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급진파와 보수파가 의회에서 좌․우로 나뉘어 좌석을 차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정치에서는 ‘반공 국시’ 시절의 ‘빨갱이’라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면서 또 다른 정치 ‘선동’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좌파인 야당 또한 마찬가지다. ‘좌파=빨갱이’ 등식을 거부해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야당 정치인들도 보수 정치인들을 ‘친일파, 수구꼴통’ 등의 프레임에 가둬두기 위해 격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교조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좌파 정치인들은 작은 이념적 차이로 인해 자체적인 ‘분열’도 거듭하고 있다.

좌․우파의 대립의 역사는 20세기부터 1세기 동안 한 발 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현재 진행형’ 상태에 머물러 있다.
 
◇민족 암흑기에도 분열은 계속…구한말부터 해방까지

민족의 암흑기인 구한말과 식민통치시대에도 지도자들은 ‘분열’과 ‘대립’의 길을 걸었다. 식민시대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좌파는 마르크스주의를 우파는 민족주의를 대표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들은 ‘주도권’ 다툼으로 와해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연해주에서 만들어진 ‘고려사회당’과 상해에서 조직된 ‘한국공산당’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계속 무너져 내렸다. 조직 결성-와해를 거듭하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1931년 이후 해방정국 때 까지 조선공산당은 재건되지 못한다. 1931년 이후 사상적 전향을 한 사회주의자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이 전향을 한 이유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이 꼽히고 있다.  

독립투쟁 역량을 높이기 위한 ‘좌․우’합작도 분열을 거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제연합에 기초한 활동을 할 것이냐 코민테른에 활동 초점을 맞출 것이냐를 놓고 좌․우파가 분열했다. 우파도 ‘자가 분열’ 대열에서 예외는 없었다. 대통령 중심제를 할 것이냐 내각 중심제를 할 것이냐를 놓고 우파 세력도 분열을 거듭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현재 우파 신문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상당한 호감을 보였다는 점이다. 동아일보는 1921년6월3일부터 8월31일까지 무려 73회에 걸쳐 레닌의 일생과 볼세비키 혁명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분열과 대립의 역사, 결국 전쟁 일으켜…해방정국부터 한국전쟁까지

해방정국 초기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좌파 정치인들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패망 이후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보복’ 당할 것을 우려해, 일본 패망 직전 ‘행정권’을 국내 명망가에게 넘기는 협상을 했다. 총독부는 우파 정치인 송진우와 협상을 먼저 했지만, 송진우는 이를 거절했다. 송진우의 계속된 ‘거절’에 총독부는 좌파 거두인 여운형에게 접근해 ‘협상’을 성사시킨다.

여운형은 총독부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정국을 장악했다. 하지만 미국의 견제와 우파의 견제 등으로 인해 건국준비위원회는 사실상 무산되고 만다.

이후 해방정국은 극심한 좌․우 대립의 연속이었다. 소련과 미국의 ‘군정’ 합의를 놓고 좌파와 우파는 찬성과 반대로 갈려 극심한 대립을 겪었고, 소련과 미국이 각각 통치한 남과 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격한 대립을 겪었다.

이승만 정부는 ‘민란’ 성격의 민중봉기를 ‘빨갱이 난동’으로 규정하고 강경진압을 고수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제주 4.3사건이다.

이후 좌․우 대립은 한국전쟁으로 극에 달하게 된다. 2차 대전에 사용된 폭탄과 맞먹는 양의 폭탄이 좁디좁은 한반도에 투하됐다. 국토는 초토화됐고, 전투로 인한 전투군인의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좌․우파의 ‘보복’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이 같은 극심한 혼란 속에 대한민국의 ‘과거사’ 청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에 민족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남 과 북,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통일…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좌파와 우파’가 사라졌다. 남에서는 좌파가, 북에서는 우파가 사라진 것. 전쟁의 혼란을 위정자들은 오히려 ‘독재’체제를 확립하는데 이용했다.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던 이승만 정부는 4.19혁명으로 막을 내리지만, 이때 당시만 해도 ‘좌파’의 개념은 없었다.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서 ‘통일’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 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쿠데타로 꺾이고 만다.

박 전 대통령의 집권 기간 동안 ‘반공’ 통치이념은 더욱 강화됐고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좌파가 남한에 설 땅은 더욱 없어졌다. 박정희 통치 기간 동안 ‘좌파’는 ‘사회주의’적 성격보다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에 대대적인 학생운동이 벌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재오 특임장관도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다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전두환 정권도 군사독재의 길을 걸으면서 ‘민주주의’ 운동은 더욱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 ‘피’의 진압을 강행하면서 한국전쟁 이후 또 하나의 역사적 상흔을 남겼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 운동의 흐름이 바뀌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미국이 군사독재정권의 ‘피의 진압’을 막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이런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미국에 대해 맹목적인 ‘우호’적 시각이 사라졌다. 이후 대학운동권에 ‘반미’ 구호가 급격히 증가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하에서는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감옥에 가는 사건들이 부지기수로 발생했다.

1982년 학생운동에는 NL과 PD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NL은 ‘National Liberty(혁명적 민족주의)’를 뜻하고 PD는 ‘People's Democratic(민중 민주주의)’를 의미하는데, NL은 미국으로부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민족통일’을 중시했고, PD는 자본주의 병폐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학생 대중을 사로잡은 것은 NL계열이었다. PD는 학생운동에서 소수로 전락했지만, 두 이념의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군부독재는 끝났지만, 분열로 역사 후퇴시켜

1987년 6월. 군사독재정권의 부패는 극에 달했고,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대학생들만의 반정부투쟁이 ‘넥타이’부대로 옮겨 붙었다. 성난 민심의 파도에 놀란 군부독재정권은 ‘민주화’를 선언했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하지만 정권교체의 절호의 기회는 야권 분열로 허공에 날아가고 만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각자 출마의 길을 선택하면서,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부세력과 결합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 자민당 총재와 지역결합을 통해 집권의 ‘꿈’을 이루게 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학생운동은 양김 씨가 집권하면서 상당히 쇠퇴하게 된다. 재야 명망가 상당수가 제도권 정치로 흡수되고, 한국경제가 3저 호황기를 맞으면서 ‘이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줄어든 점, 또 88올림픽 이후 공산권 붕괴 등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우파의 반격, 반쪽 난 민심…정권교체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한국사회는 극심한 ‘좌파’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유화정책을 ‘친북’정책으로 인식한 우파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다. 우파 인사들의 논리는 일명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언론들을 통해 대중에게 급격히 확대 재생산됐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이 우파시민단체를 자극해 이념논쟁이 본격적으로 시민사회로 확대됐다. 이념논쟁에 자유민주총연맹, 6.25참전전우회중앙본부, 한국기독교교회청년협의회 등 우파 시민단체들이 나섰고, 이후 뉴라이트 운동이 전개되면서 ‘우파개혁’이 본격화됐다.

좌․우 대립은 대북문제로만 겪지는 않았다. 일본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도 좌․우 이념대립은 격화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해 ‘정통성’이 약하다고 봤고, 민족정기를 확립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보수인사들은 ‘우파’ 인사들을 ‘친일파’라는 프레임에 가둬두기 위한 정치행위로 규정지으면서 양측의 대립이 격화됐다.

이 와중에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정치에서 상당한 도약을 하는데, 이는 분열됐던 NL과 PD가 민주노동당이라는 지붕아래 통합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총선에서 NL과 PD는 분열해 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진보정치를 표방한 정치인들이 분열한 이유도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라는 이념 논쟁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 정권을 매섭게 비판한 PD계열과 북한 정권에 ‘비판적 지지’를 한 NL계열이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행보에 대한 찬반양론에 휩싸였고, 선거를 앞두고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분당과 합당을 거듭해 현재의 민주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홍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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