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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그렇다. 첫 직장이었고, 내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한 곳이다. 또한 학교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곳이며 가장 많은 스승을 만났던 곳이다.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고, 주옥같은 후배들을 발굴할 수 있는 기쁨을 주는 곳이었다.
김앤장의 성장은 설립자 김영무 변호사의 확고한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개인의 역량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모인 팀만 못하니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발주자였던 김앤장이 선두에 서게 된 것은 이런 점이 의뢰인들의 신뢰를 샀기 때문이다.
그의 ‘사람’ 욕심은 남달랐다. 늘 자신을 뛰어 넘는 인재들을 곁에 두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다. 당시 예비법조인들이 판·검사 임관을 고집했을 때 그는 각 기수의 수석, 차석들을 영입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성사시켰다.
사람들은 왜 그들이 임관을 마다하고 김앤장에 들어갔는지 의아해했다. 이 과정에서 법조계의 신뢰가 쌓여갔다. 그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집요하게, 정성을 다해 설득했다. 부모님이 반대하면 직접 만나 설득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후배들에게 타인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을 전파하기 위해 주말에도 늘 사무실에 나왔다. 전체 사무실을 돌면서 방에 있는 후배들을 몰고, 긴 점심을 먹으면서 왜 변호사들이 함께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혼 초, 나보다 몇 년 앞서 김앤장에 들어간 남편은 그의 주말 강의에 홀려 일요일 마다 아침만 먹으면 사무실로 튀어나가곤 해 친정에서는 나를 ‘일요일 과부’라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의 주말 직강은 없어졌다. 대신 그의 역할은 그로부터 직강을 들었던 1세대 후배변호사들이 맡았다.
김앤장에서의 모든 일은 사안에 따라 적게는 두세명, 많게는 수십명이 함께 전략을 짜고 역할을 분담했다. 내 분야에서는 내가 전문가이지만 다른 분야에서 문외한이다. 전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전문가를 불렀다. 그게 의뢰인을 가장 위하는 길이었다.
회사나 정부, 어느 조직에서나 협업을 하지 않아 일을 그르치는 모습을 많이 보면서 애초부터 함께 일하는 문화를 일군 그의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가져왔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일에 철저하게 몰입했다. 풀어야 할 숙제가 있으면 늘 머리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해답이 나왔다. 많은 후배들이 느닷없이 ‘그때 그 문제,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는 전화를 받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정도(正道)를 가도록 가르쳤다. 맡은 일에 매몰돼 열심히 하다보면 편법을 써서라도 일을 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럴 때면 늘 단호한 답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일하고 싶으면 편법 쓰지 말라.”
그는 앞에 나서는 법도 없었다. 김앤장에서 일했던 13년 동안 그가 시무식, 종무식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조금이라도 공식적인 자리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는 철저히 겸손했고 칭찬받는 자리엔 항상 남을 앞세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은 유머감각이다. 긴장되는 순간, 치열하게 이해가 대립되는 속에서도 잃지 않는 명철한 유머가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었다. 그의 유머는 좌중의 긴장을 쥐락펴락하곤 했다.
법대 졸업생도 아니고, 여고 선배도 없이, 학연 혈연 지연 하나 없었던 내가 김앤장에서 즐겁게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룬 독특한 조직문화의 덕분이라는 것은 김앤장을 떠난 뒤에 실감할 수 있었다.
자연인으로서의 선·후배는 있을지언정, 의뢰인을 제외하곤 모두 같은 변호사로 여기게 했던 조직. 남편을 비롯해 나는 여전히 많은 선배들에게 듣는다. “이제까지 겪어 본 최고의 리더는 김영무 변호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