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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의 X-file] 곽노현(郭魯炫)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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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 기자

승인 : 2011. 09. 13. 23:24

* ‘미스터 클린’ 제18대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감
[아시아투데이=이진규 기자] 이진규의 X-file은 검찰,경찰,감사원,국정원,국세청과 관련하여 이슈화되는 인물이나 사건 등을 파헤치는 칼럼입니다. X-file의 첫 번째 메뉴는 ‘곽노현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감’입니다.

/출처=미디어오늘 1995년 8월 23일자 4면.
곽노현은 1954년 8월 7일 서울에서 체신부 공무원 집안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체신부 공무원으로 인사계장과 총무과장을 역임했고 모친은 뜨개질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어릴 적 사시 장애를 겪으며 동네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사시 수술을 받아 거의 치료됐다. 사시 장애로 인한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자연스레 책과 친해진다.

그는 당시 사립 명문이었던 보성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그는 같은 학번 동기 강경선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자금 마련하고자 80년 1월부터 3년여 동안 로펌 ‘김앤장’에서 근무했다. 이곳에서 그는 故조영래 변호사, 박인제 변호사, 천정배 변호사를 만난다. 그는 로펌에 근무하면서도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1980년 서울역 집회에서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와 인연을 가지게 된다.

그는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 “그때 박 교수는 사회를 보고 나는 지도부는 아니었지만 서울역 광장에서 故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7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당시 박 교수는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학생으로 총학생회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 그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 Law School’에서 83년부터 84년까지 대기업의 지배구조개혁을 중심으로 한 국제회사법과 비교경제체제를 연구하여 법학석사학위(LL.M.)를 받는다.

석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강경선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와 함께 1989년 1월 5일 진보적 법학 연구단체 ‘민주주의법학연구회’를 창립한다. 강 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고 그는 1992년 3대 회장을 맡는다.

그는 1991년 3월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가 되어 노동법, 사회보장법, 경제법의 연구 및 강의를 맡는다.

강준만 교수의 ‘시사인물사전’에 따르면 곽노현은 1993년 6월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 국가인권기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는 비엔나에서 국가보안법 개폐성명서에 기초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유럽 등에서 온 인권단체들의 지지서명을 받는 가하면 0.9평짜리 모형감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도 한다. 당시 한국 측 대표는 홍성우 변호사, 김찬국 교수, 홍근수 목사 등이었고 집행위원장은 천정배 민주당 의원이었다.

1995년 7월 검찰은 신군부의 ‘12·12 사건’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 ‘5·18 사건’에 대해서도 ‘공소권 없음’으로 결정한다.

이에 대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대외협력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그는 경실련, 참여연대, 여성단체연합, 환경연합, 민변 등과 함께 민간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대변인을 맡아 날마다 결의문과 대회문, 논평문 등을 써낸다. 또 ‘민주주의 법학 연구회’ 동료들과 함께 법학교수의견서를 작성하여 137명의 법학교수 서명을 받아 헌법재판소에 제출한다.

1996년 여당인 신한국당이 복수노조 허용 등을 담은 20여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이른바 날치기 파동이 일어나자 그는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철회 및 민주적 개정을 촉구하는 공동대책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아 활동한다.

1997년 3월 그는 삼성그룹의 편법 승계에 대한 관련법 연구에 들어간다. 97년 5월 30일 민주노총을 설득하여 민교협과 공동명의로 본격적인 토론회를 기획하고 주최한다.

그는 1998년 6월 민교협 공동의장을 맡았으며 8월엔 인권기구 공동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9월말에는 방송대학 TV 운영책임을 맡게 된다.

1999년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인권위를 특별법인이 아닌 독립성이 보장되는 국가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그는 2001년부터 인권위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2005년에는 인권위 사무총장직을 맡는다.

2000년 6월 29일 그를 포함한 법학교수 43명은 이건희 삼성회장이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저가 발행하여 장남인 이재용씨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편법상속을 했다며 이 회장과 삼성에버랜드 등을 서울지검에 상법상 특별배임 및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한다.

2009년 그는 경기도 학생인권 조례제정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학생인권 조례제정에도 참여하게 되며 다음해 2010년 민교협의 추대로 6·2 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교육감으로 출마한다.

2010년 5월 19일 그는 박명기 후보와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서울시 교육감 진보진영의 단일 후보가 되어 6월 2일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된다.



2011년 그는 초·중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겠다는 방침을 세우지만 저소득층 50%만 지원하겠다는 서울시와 갈등을 빚으면서 8월 24일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들어간다. 투표율이 개표 기준인 33.3%에 미치지 못하자 투표함 개봉 없이 투표 자체가 법적으로 무산된다.

8월 25일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주민투표 결과는 ‘아이는 아이일 뿐 가난한 아이도 부자 아이도 없다’는 진실의 확인”이라는 글을 올린다.

8월 26일 검찰은 6·2 지방선거 서울시 교육감선거에서 그와 진보 진영 후보 단일화를 한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와 박 교수의 친동생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체포한다.

이에 대해 그는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끝나자마자 금품수수 의혹을 흘리는 검찰의 의도가 의심스럽다”며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결코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고 반박한다.

8월 27일 검찰 수사 결과 강경선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의 계좌에서 박 교수 동생 계좌로 올해 2월 5000만원, 3월 4000만원, 4월 4000만원 등 모두 1억3000만원이 전달된 사실이 확인된다.

8월 28일 그는 서울시교육청에서 ‘후보단일화 뒷거래 의혹’에 대해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갖는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박명기 교수에게 2억원을 지원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오직 박 교수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서 선의의 지원을 했을 뿐”이라며 대가성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8월 29일 강경선 교수 역시 금품을 전달한 혐의로 체포되고 박 교수는 이날 밤 구속된다. 검찰은 ‘교육감 후보 단일화 대가로 곽 교육감으로부터 7억원을 받기로 했으나 2억원만 받았다’는 박 교수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9월 2일 검찰은 그의 강서구 화곡동 자택을 압수수색한다.

9월 5일 오전 11시경 그는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두한다. 그는 검찰 출두 전 “인격을 걸고 진실을 밝히겠다”고 말한다.

9월 7일 검찰은 그에 대해 공직선거법상 후보매수 등의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한다.

9월 9일 오전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떠나기 직전 그는 “진실이 저를 자유케 할 것”이라고 말한다.

9월 10일 새벽 법원은 서울시 교육감 선거 후보 사퇴의 대가 2억원을 박 교수에게 건넨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영장담당 판사는 “범죄사실이 소명되고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며 영장 발부 이유를 밝힌다. 그는 영장발부 직후 서울구치소로 이송돼 수감됐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글 중 일부다.

<<그것은 가끔 약주를 드시고 들어오신 아버지가 “세상에 왜 이렇게 부패한 놈들이 많은지...”라고 혼잣말을 하시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그 한탄은 한 집안의 가장이자 세상의 유혹과 맞서 청렴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한 공무원으로서, 아버지가 느꼈던 짙은 애환의 표현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에 당시 저는 아직 어렸습니다.

“아, 곽교수님 아버님이 ‘미스터 클린(Mr. Clean)’이셨던 곽00 과장님 이셨군요”

세월이 많이 흘러 제가 체신부의 후신인 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의 한 기관장을 만났을 때, 그 기관장은 제가 모르던 제 선친의 별명을 알려주었습니다.

“미스터 클린” 언젠가부터 제 주변 분들이 가끔 농반진반으로 저를 지칭하는 말이 제 선친의 별명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번 재판과정을 통해서 억울한 ‘미스터 클린’이 될지 ‘두 얼굴의 교육인’으로 낙인찍힐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다. 그가 앞 뒤 다른 말과 행동을 해왔다는 증거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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