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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정해용 기자] 지난 주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통해 신자가 된 저는 30여년이 넘게 성당을 다녀왔습니다.
물론 성당의 다양한 의무를 지키지 못한 불성실한 신자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족하고 부도덕한 신자입니다.
오늘 제가 개인적인 종교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한국 천주교(가톨릭)는 제 개인의 종교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분들이 믿고 따르는 종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참람되고 분수에 넘치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기회가 된다면 많은 신자 분들과 성직자분들, 그리고 천주교를 믿지 않는 다른 독자분들이 한 번쯤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하는 문제가 있어 이 자리를 빌려 말씀을 올립니다.
9월을 천주교에서는 순교자의 달로 정해서 기념합니다.
각 종 미사곡에도 이름 없이 죽어간 많은 영혼들을 기리고 있으며 그들의 믿음을 추앙하는 기도문도 있습니다.
지난 주 성당의 강론내용 역시 목숨을 내놓으며 죽음으로서 신(하느님)을 증거한 분들에게 가슴 깊은 존경과 감사,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선후기에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어간 수만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땅의 교회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며 그들의 피를 숭고하다고 높였습니다.
조선은 천주교를 박해했고 수많은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학자 이덕일 선생의 저서 ‘정약용과 그 형제들’에 따르면 1583년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 남부 광둥성에서 처음 시작한 중국선교는 그렇게 큰 박해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무슨 귀신이라도 들린 사람들처럼 처절하게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책에서는 그 곡절을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속한 천주교의 수도회 중 하나인 '예수회'는 동양의 전통사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로 극단적인 선교보다는 열린 자세로 임했습니다.
공자의 己所不欲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씀을 성경의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라는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해석한 융통성있는 자세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가 들어오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들은 예수회의 전교를 '영합주의'라고 비판하며 교황에게 금지를 요청하는 의견서를 보내는 한편 예수회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의 입장과 가까운 교황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점점 더 중국과 동양의 천주교는 보수화, 교조화돼 갔습니다.
교황 글레멘스 11세와 베네딕트 14세는 18세기 초 중반 거듭 성명을 발표해 조상의 제사를 엄금했고 1742년에는 중국내 예수회의 전교활동을 금지시키기도 했습니다.
1773년 예수회 중국본부는 해산됐고 그 후 중국 천주교도들도 큰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조상 제사문제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제사만 허용된다면 큰 마찰 없이 천주교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훈과 권일신이 중인 역관 윤유일을 베이징으로 보낸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베이징 주교의 답변을 얻기 위해서였다.
정조 14년(1790)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는 사신 일행을 따라 윤유일이 베이징에 갔을 때 베이징 주교였던 구베아는 불행히도 프란체스코파 소속이었다.
예수회가 교황에 의해 1773년 해산된 후에도 그라몽, 방타봉 같은 신부들은 베이징에 남아 있었으나 제사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구베아 주교에게 있었다.
구베아 주교가 윤유일에게 준 답변 한 마디는 훗날 조선 신자들에게 수많은 비극을 불러오는 단초가 되었다”
구베아 주교의 답변은 “제사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는 것과 위배되는 것이다” 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 천주교 신앙과 제사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었습니다.그러나 천주교의 공식견해가 전해지자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발칵 뒤집혔고 천주교는 순교를 각오한 사람만이 믿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천주교가 굳건한 믿음의 화신으로 생각한 윤지충. 그는 정조 15년(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과 함께 제사를 폐지하고 부모의 위패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유지한 채 죽음을 택하던가 배교를 하던가하는 극단적 상황 앞에 불려나가게 됐습니다.
성당에서는 흔히 순교를 아름답게 말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성경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신약성서 베드로 1서와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1서 4장 14~15절)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복음 10장32~33절)
등등입니다.이 문구를 읽다보면 당연히 순교는 아름다운 것이고 그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분명 종교적 믿음을 목숨까지 걸고 지킬 수 있었던 사람들의 영혼은 숭고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위의 성경문구에서도 “모욕을 당하면” 혹은 “사람들 앞에서” 라고 표현했지 주리를 틀고 모진 고문을 받고 삼족을 멸하는 상황 앞에서 “네 목숨을 내놓고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하느님은 없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간들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조차 내어주고 그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함으로서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
3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외면한 제자 베드로를 용서하고 로마 가톨릭의 첫 번째 수장인 1대 교황으로 세우기도 했습니다.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순교를 택한 성인들의 아름다움을 축복해주시는 신이지만 그만큼의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조차 사랑으로 보듬어 주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는 신이 천주교회에서 믿는 '하느님'입니다.
조직이 거대할수록 절대적 믿음과 교리가 필요하고 그 교리와 교조로서 그 구성원들을 결집시킬 수 있어야합니다.그렇지만 조선의 민초들,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수만명은 거대한 조직, 그리고 그 조직의 특정 수도회와 교황의 교리 해석의 태도 때문에 가혹한 운명의 칼날 앞에 고통과 번민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조상의 제사를 절대시하는 유교문화권의 한 가운데에서 제사를 폐하라고 강요한 종교지도자들의 명령은 ‘우리의 종교를 위해 네 목숨을 내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배교자이다’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문명과 문명, 종교와 종교, 신념과 신념, 정치적 이념, 그리고 서인과 남인 등 지배계층과 엘리트들의 뜻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자행한 비극은 수 만 명의 피를 대가로 요구했습니다.
조금 더 관용적이고 조금 더 절충적이며 조금만 더 믿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려줄 수는 없었을까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폭력과 억압의 시대에 종교마저 배교와 신앙의 이분법으로 여린 영혼들을 심판대위에 올려야 했을지, 그리고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조차 그 시대를 살아간 많은 사람들에게 그 영혼들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 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없었으면 이 나라에는 천주교의 믿음이 지금처럼 자유롭게 허용되고 종교의 자유를 국민 누구나 영위하는 시대가 오지 못했을까요?
풋내기 기자의 참람된 질문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