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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그룹 해체, 제일은행장 “위(?)에서 공중분해 명령”

국제그룹 해체, 제일은행장 “위(?)에서 공중분해 명령”

기사승인 2011. 11. 1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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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광원의 머니임팩트(제44회) - 5공의 부실기업 정리(상)
5공 정권의 국제그룹 해체는 1993년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판결을 받았다.  당시 용산에 있던 국제그룹 사옥.
[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 지난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는 1985년 2월의 국제그룹 해체에 대해 "공권력이 힘으로 사기업을 해체한 것은 기업의 자율과 경영권 불간섭 원칙을 위배한 것이며, 재산권 침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실상의 위헌판결을 내렸다.

재계랭킹 7위의 국제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 분해된 이 사건은 5공 재계의 최대 화제였다.

당시 5공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우리가 군기 빠진 국제그룹을 날려버렸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였다.

평생 피땀으로 일군 기업을 송두리째 빼앗긴 양정모 회장은 6공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1988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 빼앗긴 기업 되찾기에 나섰다. 1991년 증거불충분으로 패소하자, 곧바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신청한 것이다.

위헌판결 이후에도 국제그룹과 관련된 소송은 끊임없이 진행됐으나, 이미 해체된 국제그룹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국제그룹 해체 당시 국제가 주당 1원꼴로 제일은행에 넘겼던 주식은 해체발표 당시에도 장외에서 주당 300원 대에 거래되고 있었다. 국제그룹 해체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위헌소송 당시 최병모 변호사의 진술이다.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신발 재벌이던 국제그룹은 모 기업인 국제상사를 중심으로 연합철강, 국제방직, 국제제지, 동서증권, 동해투자금융, 국제상선, 조광무역, 국진기업, 신동제지, 국제통운, 동우산업, 국제토건, 국제종합건설, 국제종합기계, 성창섬유, 국제종합기술개발, 풍국화학, 연합물산, 국제제철, 보고산업, 국제종합엔지니어링 등 22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984년 매출액이 1조7913억 원, 수출액 9억3400만 달러를 기록했고 종업원 수 3만8800여 명에 달하는 매머드급 복합기업집단이었다.

총 여신규모는 1984년 10월말 현재 1조4458억 원으로 부채비율이 946.6%였다. 당시 10대 재벌이 평균 527%였으니, 국제그룹의 재무구조가 나쁘고 부실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는 "국제그룹의 재무구조가 취약했던 것은 1970년대 중반이래 급속한 사업확장 과정에서 부실기업의 대거 인수 및 무리한 사업확장을 지속한 때문"이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서울 용산에 매머드빌딩인 신사옥을 건설하는 동시에, 제주도와 부산에 초대형 하이야트호텔과 양산 통도사 골프장 건설 등 의욕적으로 사업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한국재벌사》).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은 국제그룹의 자금난 타개를 위해 2000억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 와중인 1984년 12월 23일 정부는 국제그룹에 대한 완매채 대환 지원방침을 철회한다. 완매채 대환이란 어음을 단자회사에 맡기고 지급보증을 받은 후, 이 지급보증서를 근거로 각종 기금에서 상당액의 채권을 빌리고, 이렇게 확보한 채권을 증권회사에 담보로 제공해 자금을 융통하는 것으로, 기업들이 거액의 자금을 조달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당초 국제의 완매채 잔액 865억원을 전액 은행여신으로 지원하기로 한 결정이 갑작스럽게 철회된 것이다.

그 4일 후인 12월 27일, 제일은행은 교환에 돌아온 국제상사 어음 78매 432억 원을 부도처리한다. 국제그룹은 다음날 이 어음들을 전량 회수해 결제를 끝냈으나, 이를 계기로 항간에서는 국제그룹 해체설이 나돌고, 신용도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국제그룹에 5504억원을 빌려주고 있던 제2금융권이 일제히 여신회수에 나섰다. 그룹 총 여신의 40%가 제2금융권에서 차입한 것인데, 1985년 1월 23일까지 212억 원이 회수됐다.

마침내 2월 21일, 국제그룹은 전격적으로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계열사들은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한일합섬그룹이 국제상사 등 5개, 연합철강 등 동국제강이 3개, 우성건설이 2개의 계열사를 넘겨받았고 극동건설, (주)동방, 아세아시멘트, 동양고무 등도 하나씩 인수했다.

당시 김만제 재무장관은 국제그룹 해체의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사업 운이 따르지 않은 결과다. 벌여놓은 일들이 수습되지 않고 부실 구멍은 자꾸 커져 갔다. 건설부문의 경우 아주 엉망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한 푼 두 푼 넣어서 될 상황도 아니었다. 또 그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을 그만큼 늘려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해체 당하게 된 것이 국제다"(이종재, 《재벌이력서》)

이렇게 김 전 장관은 국제그룹의 해체가 부실경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룹은 부실하게 해놓고, 경영을 잘해서 이를 풀려고 하기보다 청와대와 고위층 주위를 들쑤셔 해결하려 했다. 주거래은행이나 재무부에 한 마디 안한 것은 물론이다. 은행이나 당국을 우습게 봤거나, 사태 자체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경영은 부실한데, 족벌경영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해결책으로 군 출신 인사를 동원할 생각도 했다. 결국에는 국제상사 사장도 지낸 손상모씨에게 국제의 수습을 부탁했다. 그는 당시 미국 하버드 유학까지 마친 사람이었다.

부탁을 받은 손씨는 양 회장에게 가서 정부가 내놓은 수습방안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 회장은 '영감이나 사위를 모두 아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손씨를 통해 전달한 수습방안이 국제 해체의 시그널이 됐다"

또 주거래은행이던 제일은행의 당시 이필선 행장의 주장은 이렇다.

"그 당시 국제를 부도내 도산시키는 쪽으로 해결했더라면, 양 회장은 아마 감옥에 갔을 것이다. 은행의 공신력을 감안해 밝히길 꺼렸지만, 사실 국제그룹이 해체되기 전 4개월 동안 지원해 준 구제금융만도 2000억원이 넘었다. 그룹의 경영이 방만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경기전망도 어두웠고, 국제에 무한정 돈 대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매일매일 돌아오는 어음이 수백억원씩이었다. 양씨는 '설마 재벌을 망하게 하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정치적 입김 얘기는 말도 안 된다"(이종재, 《재벌이력서》)

그러나 이 사건을 보는 여론의 시각은 이들과 전혀 다르다.

"항간에 국제그룹의 해체를 둘러싸고 설이 분분했다. 즉 양정모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움을 사 정부지원이 중단, 금융권으로 하여금 서둘러 여신을 회수케 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양 회장은 정치적 로비활동에 소극적이었으며, 준조세 납부에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국제그룹은 타 그룹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적은 액수를 기부했고, 그나마도 고위층의 협박성 압력이 돌아온 후에나 참여했다.

더욱이 1984년 12월 22일(완매채 지원방침 철회 바로 전날)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재벌총수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 지각하는 바람에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한다.

또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당시 정권은 부산총선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였다. 양 회장은 1985년 2월 5일의 부산총선 지원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당시 연고가 없던 재벌총수들도 총선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집결한 반면, 양 회장은 부산이 연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대통령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총선 이후 9일 만인 2월 21일 국제그룹은 완전 분해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양 회장이 정치성 로비자금의 제공에 인색했던 것은 일해재단의 설립시 출연내역으로도 확인된다. 전 대통령이 퇴직 후를 대비하기 위해 설립한 일해재단은 우리나라의 내로라 하는 재벌총수들로부터 찬조금을 받았는데, 양정모의 기부액은 5억원에 불과했다. 30대 재벌 중 가장 적은 액수였다"(이한구, 《한국재벌사》)

괘씸죄의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되는 청와대 모임 지각사건은 어떤 사건인가.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양정모에게 전 대통령은 "어디 외국에라도 갔다 왔습니까?"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양정모는 도리어 "부산지역 경제가 워낙 낙후돼 민정당 지지기반이 취약하니, 임해공단을 건설해 달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이 한마디가 대통령을 더욱 불쾌하게 했고, 국제그룹에 대한 모든 지원 중단으로 연결됐다는 것이 국제 측 인사들의 주장이다.

"국제그룹 해체는 건국이래 최악의 경제학살사건이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적 타살사건이다. (정권은) 어떤 기업에 대해서는 정상화에 필요한 상당한 시간을 주고 어떤 기업은 은행관리.법정관리 등으로 기사회생의 길을 열어주고도, 국제만은 발기발기 찢었다.

자구계획의 실행기회를 박탈하고 주거래은행장의 협박 아래 이루어진 것이 국제 해체이며, 법적 근거도 없는 '선인수, 후정산'이란 방법으로 경영주의 참여를 원천봉쇄한 가운데 인수자를 결정했다"

국제 측 인사들은 그룹 해체 이전부터 청와대와의 밀월소문이 나돌던 기업들에게 계열사들이 넘어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국제상사의 신발무역 부문은 한일그룹에 넘기고, 다른 기업의 선정권도 준다. 국제상사의 건설부문은 극동건설에 주고, 쓸 만한 기업을 끼운다.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이 맡고, 연합철강의 기업내용이 알차니 부실한 국제종합기계를 함께 넘긴다는 것이, 국제 해체 발표 10일 전인 2월 11일 청와대에서 결정된 국제그룹 정리방안이다"(이종재, 《재벌이력서》)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국제의 해체는 전적으로 괘씸죄다. 5공의 정치권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타살된 것이다.

우선 정치자금을 적게 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1983년 새마을성금을 내는 데, 재벌랭킹 7위였던 국제는 3억원을 내 성금랭킹 30위였다. 더구나 1984년에 낸 새마을성금 10억원은 3개월 짜리 어음이었다. 다른 그룹들은 대부분 7억원 이상씩을 냈고, 나중에 연합철강을 인수해 간 동국은 새마을성금과 심장재단 기부금을 합쳐 무려 30억원이나 냈다.

국제를 곱게 봐줄 리가 없었겠지.

이후 일해재단 성금모금 규모가 너무 많다고 주장한 일, 부산 새마을운동 지부장직의 사임, 청와대 만찬의 지각, 총선을 앞둔 1982년 2월 대통령의 부산 방문시 자리를 지키지 못한 일 등이 모두 대통령에게는 불경죄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국제 이상으로 부채가 많은 기업이 여럿 있었으나 국제가 부실로 찍히게 된 것은 고위층의 미움을 샀다는 이유 이외에는 없다"

양 전 회장은 1988년 국회 5공 비리 청문회에 출석,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다.

다음은 공화당 김종식 의원과의 일문일답.

- 제일은행장이 국제그룹에다 '위의 지시이니 더 이상 버텨보았자 소용없다'고 했나?

▲2월 21일 밤 전화가 와서 만났더니, 은행장은 '미안하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기를 국제를 공중분해 시키라고 했다. 양해해달라. 불응하면 당신은 물론, 가족까지 다친다'고 했다.

'일해재단 모금 300억원이 너무 많다. 훗날 말썽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나를 죽인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 다른 기업에 비해 국제의 경영상태는 어떠했나?

▲40년 전 고무공장 한 개 상속받아 23개 기업체로 키웠으며, 연간 10억 달러씩 수출했다. 외형매출액 2조원에 부채가 1조5000억원이었다. 재무부 자료에 부채율이 900%로 되어있으나, 2만%인 기업체도 잘 버티고 있다.

대통령에게 잘못 보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내 마음대로 죽이고 살린다'고 선언하는 소리도 들었다.

다음은 평민당 김봉욱 의원의 질의다.

- 국제가 부도나는 대로 놔두는 것과 정리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종업원과 관련 업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가?

▲정부가 내 기업을 빼앗아 가 다른 기업에 나눠주며, 6000억원을 지원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2000억원을 지원해주지 못한단 말인가?

- 그룹이 공중분해 되기까지의 경위는?

▲1984년 5월께 청와대 만찬이 있었다. 전 대통령이 중간에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기업체를 키우려면 키울 수 있고,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다'고 해 참석자 모두가 가슴이 섬뜩해졌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날보고 하는 얘기였다.

- 전경련회의 때는 연령 순으로 좌석배치를 하는 반면, 청와대 모임에서는 돈 많이 낸 순서로 앉혔다는데.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으나, 나는 10억원의 새마을성금을 냈을 때 딱 한번 대통령 바로 옆에 앉을 수 있었다.

이어 민주당 노무현 의원의 질의가 시작됐다.

- 부채비율이 900%라고 했는데, 10대 기업 중에 그 이상 부채비율을 가진 기업은 없었나?

▲있었다.

- 당시 증인이 작성한 자구계획서가 거래은행에서 잘 됐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는가?

▲그렇다. 주거래은행을 비롯, 은행감독원에서도 잘됐다고 평가했다.

- 그룹 해체 결정 후 정부관계자들을 찾아다녔나.

▲해체 6개월 전 김만제 당시 재무장관에게 하소연했더니,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해체 후에는 이규호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났다.

- 해체 전후에 재무장관이 연합철강 전사주인 권철현씨에게 연철을 도로 인수하라고 해 기다렸는데, 갑자기 '청와대에서 결정했다'며 동국제강으로 인수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나?

▲들었다.

- 신한투자금융은 사돈이 경영해 국제와 관계없는데도, 재무장관이 잘못 해체했다는데.

▲사실이다.

마지막 질의에 나선 것은 공화당 정일영 의원.

- 국제가 비협조 재벌로 낙인찍혔다는 것을 알고 최순달씨를 백방으로 찾아 사죄했다는데, 이때 최씨의 반응은?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러고 나서 모금은 나중에 돈을 서로 내려고 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대통령이 재벌총수 등을 모아놓고 겁을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을 것이다.

국제의 도산은 외국에서마저 말썽이 나서, 대통령은 30대 재벌을 모아놓고 '앞으로 국제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말고 잘하라'는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기금을 낼 수 없는 한 참석자는 이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재벌들은 완전히 권력 수중에 들어갔고, 모든 성금은 잘 거두어졌다.

- 당시의 재계 형편을 설명해달라.

▲재주가 많은 사람은 돈 많이 내고 잘 보여 급성장했고, 나 같은 사람은 망했다.

- 마지막으로, 인수인계 당시에도 도장찍으라는 강요를 받았나?

▲제일은행장과 재무차관보들이 내게 매달리며, 생활을 보장해주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찍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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