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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힘있는 사람에게 괴로움 당하지 않으려 돈 냈다”

정주영 “힘있는 사람에게 괴로움 당하지 않으려 돈 냈다”

기사승인 2011. 12. 1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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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광원의 머니임팩트 48회 - 5공 정치자금과 금융계(중)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치자금 공급의 수원지를 독점함으로써 민정당을 사당화했고, 여당 정치인들을 사병화할 수 있었다.
[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 당시 일해지단 청문회에서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재단기부금 중 각종 헌금이 부도덕하고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가.(민정당 안병규 의원)

23억 모금 때는 자진해서 냈고, 1차 모금 때는 취지가 좋아 찬성해서 냈다. 그 후 돈을 받는 측에서는 100억 씩 3년 간 계속 걷기로 했다고 했다. 우리(전경련)는 처음 걷은 100억을 가지고 충분할 줄 알았다. 분명히 100억이면 충분히 재단운영을 해나갈 줄 알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렵지만 돈을 내자고 권장하는 편이었다. (전경련 회장인) 내가 100억을 업체별로 할당했다.

3년 동안 계속 100억씩 걷자고 결정할 때 토론하거나 의논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기가 힘들어졌고, 안낼 수 없어 계속 냈다. 100억을 넘어 200, 300, 500억으로 모금액이 늘어날 때마다 매우 힘들었다.

- 장세동씨는 모금과정에서 '강압이 없었다'고 했고, 양정모씨는 '강제로 냈다'고 했으며, 조성희씨(일해재단 초대 사무처장)는 '강압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는데, 어느 얘기가 맞다고 보는가.

▲낸 사람 각자 나름일 것이다. 내 경우 1차 때는 '날아갈 듯이' 냈고, 2차 때는 '이치에 맞지 않았지만' 냈다. 3차 때는 '(억울하지만) 내는 게 편안할 것 같아' 냈다.

- 양정모씨의 주장처럼 기부금을 내지 않아 국제그룹이 해체됐다고 생각하는가.

▲내게 물어볼 사항이 아니질 않는가.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 말한다면, 국제그룹 해체는 잘못된 일이다.

- 증인은 '시류에 순응한다 함은 힘있는 자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는데.(민주당 노무현 의원)

▲그렇게 말했다.

- 이 말은 힘있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도 포함되는가.

▲나는 이를테면 대통령과 같이 힘있는 사람이 기업을 돕는 것을 원치 않는다. 시류에 순응한다는 의미는 힘있는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 일해재단이 사유물시 되거나 막후 권부로 있을 때는 묵묵히 순종하다가, 권력이 퇴조하자 소신을 밝히는 것 아닌가.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가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다.

사실 5공 7년 동안 정주영과 정권과의 관계는 매우 불편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을 겸하고 있던 정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정권과 협력하긴 했지만, 피차가 상당히 껄끄러운 관계였다.

특히 5공 정권 출범 직전인 국보위 체제 하에서 감행된 산업구조조정에 대해 정 회장은 불만이 많았다. 당시 현대그룹은 창원의 현대양행(현재의 두산중공업)을 1원 한 푼 못 건지고 통째로 강탈당했고, 정 회장의 동생 정인영 회장은 옥고까지 치러야 했다.

반면 대우 김우중 회장은 '선 인수 후 청산'이라는 특혜로 현대양행을 가져갔으나 스스로 포기하고 정부에 반납,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이 됐다가 1998년 민영화됐다.

당시 정 회장은 그 살벌한 시국 하에서도 경총이 마련한 공개석상에서 "공산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민간이 설립한 기업을 정부가 강제로 합쳐라, 말아라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노골적으로 반발한 적이 있다. 정인영은 1991년 현대양행 반환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기업별 일해재단 기부금 내역은 장세동의 책 《일해재단》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가장 많이 낸 사람은 현대그룹 정주영으로 51억5000만원을 출연했고, 2위는 45억원을 기부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박태준 포항제철 명예회장이다.
 
이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40억원, 구자경 LG그룹 회장 30억원, 최종현 SK그룹 회장 28억원, 이희건 신한은행 회장 25억원, 이준용 대림산업 부회장 23억원,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22억원,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20억원 등의 순이다.

유찬우 풍산금속 회장 18억원,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장치혁 고려합섬 회장이 각각 15억원,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14억5000만원,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13억원,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 및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은 각각 10억원이다.

또 두산그룹 박용곤.삼양사 김상홍.한일합섬 김중원.효성그룹 조석래 각기 9억, 대농그룹 박용학.한일시멘트 허채경.종근당 이종근 각각 8억, 코오롱그룹 이동찬.기아산업 김선홍.미원그룹 임대홍 각기 7억, 해태그룹 박건배.동양그룹 현재현.동아제약 강신호.삼환그룹 최종환 각각 6억, 태평양그룹 서성환 6억5000만원 등이다.

국제그룹 양정모, 동경상은신용조합 허필석, 일본제일흥업 배종성은 5억을 냈다.

"그러나 일해재단 모금은 5공 정권이 기업인들에게서 거둔 정치자금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 7년 동안 각종 성금, 인허가 리베이트, 선거지원 모금 등 정치자금으로 대략 1조원이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한구, 《한국재벌사》)

일해재단 모금 598억원, 새세대심장재단 298억9263만원, 새세대육영회 236억원, 새마을성금 1526억원 등 성금 성격의 정치자금만 2659억원이다.

여기에 민정당 지정 정치기탁금을 합친 5대 항목의 기부금 명세를 보면, 대체로 재계 매출액 순위와 비슷하다. 1위인 현대그룹이 185억7000만원, 2위 삼성그룹이 162억원을 냈다.

매출액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난히 많이 낸 기업은 한일합섬그룹 103억원, 동국제강 63억5000만원, 대림산업그룹 66억원 등인데, 이들은 부실기업 정리 과정에서 큰 수혜를 입은 기업들이다.

"이순자씨는 새세대심장재단 기부금을 1984년 1월 9일부터 받기 시작했다.
1984년 10월 8일 동국제강의 장상태 회장은 20억원을 기부했다. 그 때까지 최고 기부액은 현대자동차 정세영 회장으로 7억원이었다.

다음해 2월 4일 김만제 재무장관은 국제그룹을 해체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차관보를 연합철강의 전 소유주인 권철현 씨에게 보내 연합철강을 포함한 국제계열 10개회사를 인수해 줄 것을 제의했고, 줄다리기 끝에 응낙을 받았다. 그러나 전 대통령의 결재과정에서 권씨는 배제되고 한일합섬, 동국제강, 극동건설 등이 인수자로 선정됐다.

국제그룹 내 노른자위인 연합철강을 인수한 것은 동국제강이었다.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은 연합철강을 인수한 그 해, 이례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12억5000만원을 일해재단에, 다음해엔 2억원을 두 번째로(이것도 이례적이다) 새세대심장재단에 기부했다.

한일합섬의 김중원 회장은 국제상사를 인수한 뒤, 일곱 번에 걸쳐서 15억원을 심장재단에 기부했다. 일해재단 및 심장재단에 낸 공식기부금까지도 일부 기업에서는 이권을 따기 위한 뇌물성 정치자금으로 이용했다.

이순자씨도 또 다른 '자금 = 청탁접수창구' 였다는 얘기다"(월간조선 1992년 3월호)

동부그룹 김준기 회장은 1984년 8월 포항제철로부터 동진제강(장영자 사건으로 부도난 일신제강을 포철이 인수해 정상화시킨 후, 다시 불하한 회사. 현 동부제강)을 불하받고 10월에 심장재단 성금 30억원, 새마을성금 20억원, 도합 50억 원을 냈다고, 손건래 전 동진제강 부사장이 1989년 1월 국회에서 시인한 바 있다.

이 같은 5공 정경유착의 하일라이트는 역시 전두환 비자금사건이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수뢰, 부정축재사건'의 피고 전두환에 대한 검찰 공소장을 보자.

"1982년 12월 경 청와대에서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으로부터 정부 또는 정부투자기관 등이 발주하는 각종 국책사업의 사업자선정, 금융, 세제운용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현대그룹에 대해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10억원을 교부받고,

1983년 12월경 청와대에서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로부터 금융, 세제운용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삼성그룹에 대해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10억원을 교부받고,

1984년 12월경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으로부터 정부 또는 정부투자기관 등이 발주하는 각종 국책사업의 사업자선정, 금융, 세제운용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동아그룹에 대해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50억원을 받고,

1980년 11월경 청와대 부근 안가에서 한진그룹 회장 조중훈으로부터 그 무렵 김포공항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소속 KE015 여객기 추락사고에 대한 해명과 함께, 위 사고로 인하여 항공운송사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 금융, 세제운용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한진그룹에 어떤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10억원을 교부받고,

1984년 6월경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한일그룹 회장 김중원으로부터 한일그룹의 상속재산 분배문제로 형제간에 분쟁이 있었던 점에 대한 해명과 함께 그로 인하여 금융, 세제운용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한일그룹에 어떠한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50억원을 교부받고,

1985년 9월경 청와대 대통령 접견실에서 금호그룹 회장 박성용으로부터 항공운수사업에 대한 면허, 금융, 세제운용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금호그룹에 대해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제공하는 20억원을 교부받고,

1986년 12월경 청와대에서 미원그룹 회장 임창욱으로부터 미원그룹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조기에 종결하고, 세금을 적게 부과하도록 국세청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70억원을 교부받고,

1984년 6월경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 쌍용그룹 회장 김석원으로부터 쌍용그룹에서 추진중인 강원도 평창군 도하면 수암리 소재 용평골프장 건설에 대해 내인가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같은 해 10월경 위 골프장 건설에 대해 내인가를 해준 다음, 같은 해 11월 초순경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10억원을 교부받고…"

이처럼 검찰의 공소장에는 '선처해 달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넘어, 구체적인 청탁내용과 이에 따른 대가로 수십 억 원이 오갔음을 적나라하게 적시하고 있다.

현대 정주영, 삼성 이병철 등이 '겨우(?)' 10억원을 바친 반면 동아 최원석, 한일 김중원이 50억원, 미원 임창욱은 무려 70억원이나 상납한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일 것이다.

전두환은 이렇게 거둬들인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어떻게 썼을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우군관리'에 그 비자금을 썼다. 우군이란 누구인가. 전 대통령으로부터 월 20억원씩의 운영자금을 받은 민정당, 약 1500억원의 대통령선거자금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전 대통령 측이 주장하는 액수) 노태우 후보측, 총선에서 1~3억원 씩 받은 민정당 의원들이 그들이다.

전 대통령은 정권 운영자금 공급의 수원지를 독점함으로써 민정당을 사당화했고, 여당 정치인들을 사병화할 수 있었다."(월간조선 199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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