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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화의 멋있는 음식이야기]초겨울의 바다향기 굴생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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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12. 11. 19. 09:00

가을이 깊어갑니다. 비도 자주 오고, 바람이 스산합니다. ‘이리 비오고 바람 불면, 엊그제 본 빨갛고 노란 단풍, 은행잎 다 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늦가을, 겨울의 입구입니다. 부는 바람이 춥게 느껴져 옷깃을 여밉니다. 이젠 겨울코트를 입어야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얼마전 내년 방송할 드라마의 로케이션을 위해 충남 서천을 다녀왔습니다. 제가 워낙 맛난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군수님을 만나고 이런저런 미팅을 서두르면서도 늦가을 서해안의 온갖 맛난 걸 다 상상하며 마음은 이미 훌쩍 저녁식사에 가 있었습니다. 요새는 뭐가 제철이지, 대하도 맛있고 조개도 좋은 철인데 또 뭐가 있지? 드디어 미팅이 다 끝나고 그 아름다운 춘장대 해수욕장 근처 식당으로 바삐 갑니다. 군의원님이 고집스레 일행을 데려간 집. 한상 그득히 해산물인데, 주인아주머니가 생굴 한 접시랑 방금 무쳤다며 무채로 빨갛게 버무린 굴생채를 주십니다. 탱글탱글한 굴. 아, 너무 반가우면서 옛 추억이 떠오릅니다.

제 고향은 충남 홍성이지만, 외가는 홍성에서 더 들어가는 홍북이라는 곳입니다. 옛날에는 홍북에 가려면 참 멀었지요. 초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외할아버지 댁에 갑니다. 홍성도 먼데, 거기서 30분은 더 버스를 타고 가고, 버스에서 내려서 30분은 걸어들어갔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지요. 외할아버지가 오래 편찮으셨는데, 곡기를 못 드시고 삼시세끼 청주 한 잔과 굴 한 종지를 식초랑 간장으로만 간을 하셔서 후루룩 드시곤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외할아버지 드시는 그 굴이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던지요! 그날밤, 도저히 참을 길 없어 밤에 몰래 부엌으로 가서 그 굴을 조금 몰래 먹었다가, 외사촌형에게 들켜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어른이 편찮으셔서 밥 대신 드시던 그 굴을 제가 손댄 거지요. 외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며 용서해주셔서 사건은 넘어갔지만, 지금도 확실히 기억납니다. 생굴 속살의 희뿌연 우유색깔. 목젖을 타고 넘는 굴의 뭉클하고 낯선 질감. 그 짭짜름하고 비릿한 바다향기와 맛. 굴을 씹을 때 느끼는 원시적이기까지 한 이 식감. 그 이후, 굴은 저에게 묘한 의미입니다. 맛있는 음식의 대명사이면서, 비밀을 간직한 신비한 음식이 되었답니다. 

인간이 굴을 섭취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옛날 석기시대부터라고 하고,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더 좋아하고 일찍부터 애용한 것 같습니다. 서양인은 굴을 강장제로 여겨서 ‘Eat oysters, love longer(굴을 먹어라. 보다 오래 사랑하리라)’ 하며 미신적으로 집착할 정도고, 심지어 중세에는 굴을 최음제로 간주한 적도 있습니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을 만드는 데 쓰이는 특별한 아미노산과 아연(zinc)이 넘친다는 것으로, 우리식으로 말하면 ‘바다의 인삼’인 셈입니다. 서양에서는 수산물을 날것으로 먹는 습관이 없는데, 굴만은 예외적으로 날것을 즐겨 먹기 때문에 전체 수산물 생산량에서 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습니다.
 
프랑스 대작가인 발자크가 한번에 12타스(1444개)의 굴을 먹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고, 독일의 명재상인 비스마르크는 한번에 175개를 먹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화도 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 1세는 전쟁터에서의 세 끼 식사 때도 사정이 허락되는 한 많은 굴을 먹었다고 합니다.

조간대의 개펄에서 나는 자연 굴이나, 망에 넣어 키운 것이 더 맛좋다고 하는데 여름엔 찌는 무더위와 작열하는 땡볕에 자주 노출되고 겨울엔 땡땡 칼 추위에 찬바람을 맞아 그렇다고 합니다. 극한 상황을 겪는 생물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몸에 여러 영양분을 그득 쌓아놓으니 육질(肉質)이 더없이 좋은 거지요. 자연산 굴은 항상 바닷물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라 밀물 때만 바닷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햇빛에 드러나기 때문에 자라는 속도가 느리답니다. 그래서 크기가 작지요. 하지만 고소한 맛만큼은 최고 중의 최고이지요.

다시 서천. 지금이 한창 제철인 무는 그 자체로 단맛이 있습니다. 깔끔하게 잘라놓은 무체에, 새우젓 간을 좀 하고, 고춧가루를 뿌려 살짝 절입니다. 동네 할아버지가 서천앞바다에서 땄다는 우윳빛깔도 선명한 햇굴을 버무립니다. 무의 고소한 맛과 청량감이, 굴의 비린내를 잘 잡아주는 훌륭한 궁합입니다. 무는 씹을 때 사각거리는 질감과 함께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통통한 우윳빛 굴은 빨간 무채와 함께 반짝거리기까지 합니다. 달달한 무에 향긋한 굴의 풍미가 어우러진 이 훌륭한 맛. 뜨거운 밥을 시켜서 함께 먹습니다. 아, 밥과 버무러진, 왕이 부럽지 않은 이 맛의 홍수. 일행 모두, 아줌마에게 핀잔을 들어가며 그날 음식점에서 무친 굴생채를 다 먹고야 말았습니다. 덕분에 다른 해산물은 뒷전이었지요. 굴무생채는 바로 해서 바로 먹어야 맛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겨울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추운 겨울은 싫지만, 겨울에는 굴을 먹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집사람에게 전화해서 굴을 사오라 했습니다. 굴생채를 생각하니 조금 빨리 퇴근해야겠습니다. 따로 작은 접시에는, 생굴에 식초 약간 간장 약간 넣고, 실파좀 넣어서 한 번에 ‘원샷’으로 후루룩 마실 겁니다. “외할아버지, 그때 죄송했습니다” 하면서요.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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