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지났습니다. 설 전날 저녁, 고향 대전에서 방울 토마토 농장을 하는 친구네에 가서, 조촐한 바비큐파티 했습니다. 숯불준비를 해서, 아버님, 형님들, 장성한 조카들과 함께 삼겹살이랑 조개, 석화도 구워 먹었습니다. 친구 처가 맛나게 담가놓은 김장김치하고요. 어렸을적 이야기로 시간가는줄 몰랐지요. 팔순 넘으신 아버님도 참 즐거워하셨습니다. 식구란, 같이 한 솥 밥을 해먹는 사람들이라지요. 한 식구 모처럼 깔깔거리고 참 즐거웠답니다. 눈으로 보는것만이 음식이 아니고, 맛있는 것만이 음식이 아닙니다. 역시 음식은 이야기이고, 추억인것 같습니다. 꽤 추운 겨울 밤, 야외에서, 이야기꽃 피우며 함께 해 먹는 음식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또 하나의 이야기이지요.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옛날엔 나 어렸을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이야기말이지요. 어찌나 정겨운지요. 실컷 고기랑 석화를 먹고 나서는, 적당히 술과 기분에 취하시고 숯불 열기에 불그스레 상기되셔서 옛 이야기하시는 아버님의 얼굴위로 옛 생각에 빠져들었답니다.
예전에는 겨울이 지금보다 길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 달리 할 일이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겨울밤은 길고 길어서, 식구끼리 모여서 민화토도 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배가 출출해집니다. 이때 슬그머니 할머니께서 아궁이에 묻어놓은 군고구마를 꺼내 오십니다. 긴긴 겨울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씩 까먹는 군고구마의 맛은 음식이라기 보다는 추억의 한 부분인것 같습니다. 전화로 시켜먹는 치킨이나 족발에 비할까요!
아궁이에 묻어놓았던 군고구마는 검댕이 많이 묻어서, 이걸 효율적으로 제거하지 못하면 얼굴이 숯검댕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뭐, 물론 약간의 숯검댕은 같이 먹어도 오히려 구수하기도 합니다만. 뜨거운 군고구마를 한 입 베어물면, 그 뜨겁고 달달한 노란 고구마의 속살이 입안에 한가득 찹니다. 너무 달지 않은, 구수하게 달달한 이 맛! 너무 뜨거워 입안에서 혀를 굴리면서 먹어야 합니다. 김을 식혀야 하니 고구마를 호호 불면서요. 역시 군고구마는 뜨거울 때 먹어야 제 맛입니다. 숯검댕 묻은 군 고구마 껍질을 벗기면 드러나는 그 노란 고구마의 속살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친숙한 느낌이지요. 잘 익어 노오란, 호박 고구마 속살 말입니다. 고구마는 아시다시피 다이어트와 혈압, 성인병 예방에 아주 좋답니다.
이때쯤 되면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시지요? 군고구마의 영원한 파트너, 동치미입니다. 초등학생 막내인 저에게 어머님이 동치미를 떠오라 하십니다. 뒷마당 장독대로 달려갑니다. 겨우내 동치미를 품었던 장독대 안에는 풋고추와 숯 덩어리가 둥둥 떠 있고, 그 위로 살얼음이 살 얼어 있습니다. 너무 추우니까 쏜살같이 한 그릇 퍼 오지요. 한모금 마시지요. 장독대에서 방금 꺼내온 살얼음 악간 떠 있는 동치미는 참으로 시원합니다. 새콤하면서 국물이 톡 쏘는게, 마치 탄산음료를 마시는 느낌이 들지요. 서늘한 무의 기운이 감돕니다. 하얀 동치미를 한 입 베어물면, 아삭하며 씹히는 무의 달고 쌉사름한 식감이 행복합니다. 추운 겨울 내내, 땅속의 기운을 오래도록 받아서, 맛이 들대로 든 겁니다. 둥둥 떠 있는 고추의 맛까지 스며들어, 약간 매콤하고, 새콤하기도 하고, 또 달달하기도 하지요. 깔끔한 뒷맛입니다.
동치미 / 이지엽
깜깜한 밤, 아내 몰래 여자 하나 훔치러 간다
아내보다 더 새침하고 뒷맛이 깨끗한 여자
동지섣달 햇볕 안 든 추운 방, 좁은 방에서
아무 일 없이 아무 말 없이 머리만 빗는 여자
입맞춤은 서늘하여 발끝까지 서늘은 하여
동치미는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즐겨 담가 먹은 것 같습니다. 겨울에 소금물에 절여 담근 채소, 동침(冬沈)에서 동치미가 유래한 것이지요. 동치미는 1950~60년대,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에, 연탄가스에 중독된 사람에게 먹여 응급처치를 해 살려냈다다는 기록이나 서술이 참 많습니다. 제가 제작한 드라마 <불후의 명작>에는 급체한 미국대사부인을 동치미를 먹여 살려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치미는 체했을 때 특효약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참조한 것입니다. "겨울에는 무 먹고 여름에는 생강 먹으면 약 먹을 필요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까요.
요사이는 길거리에서 군고구마 파는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고구마값이 비싸서 수지가 안 맞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군고구마를 샀다해도, 옛날처럼 살얼음 살 떠있는 동치미가 없지요. 너무 강하지 않은, 지친 삶에 한 점 휴식같은, 그리운 맛입니다. 거칠어진 마음까지 순하게 달래줄 것 같은, 참 착한 맛이지요. 춥고 긴 겨울밤, 군고구마와 동치미가 생각나는 밤입니다.









